아기들, 그것도 신생아들은 웃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그동안 이러한 아기의 미소, 웃음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왔다.

그 결과, 미소는 단순한 미소 자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정을 유발하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신생아)는, 외부의 자극에 상관없이 미소를 지을때가 많다.

이것을 자발적 미소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발적 미소는 아기가 잠잘 때 자주 보인다.





 

그 후, 생후 2개월이 되면, 시각과 청각, 촉각 등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외발적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기의 부모님은 이 미소를 보고 기뻐하고,

또 웃는 아기에게 부모님도 웃어주거나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행동을 하면서

상호작용은 점점 늘어간다.




 

Fantz 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기는 다른 어떤 자극보다 사람의 얼굴을 선호한다고 한다.

즉,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한 달 정도(생후 3개월)가 지나면, 부모님 등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미소를 짓는다.

이것을 사회적 미소라고 한다.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미소짓는 것이,

다른 사람의 미소나 자신에게 말 걸어주는 것과 같은 응답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알게 되고,

친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친한사람뿐만 아니라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미소를 잘 지어주는데,





 

생후 5개월이 넘어가면, 사회적 미소의 상대를 가리기 시작해서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게 된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미소의 회수가 많아지고 더 많이 웃거나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행동의 횟수가 줄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후 7~8개월이 되면 모르는 사람에게는 미소를 짓지 않고 고개를 돌리거나 울게 된다.

이렇게 생후 8개월 때 사람의 낯을 가리는 것을 8개월 불안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럼 왜 생후 6개월을 경계로 아기는 이러한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 아기는 태어나면서 원시적 반사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원시반사의 예로 파악반사가 있다.

파악반사는 아기의 손바닥에 연필이나 손가락 같은 것을 두면 꽉 쥐는 것을 말해.



 


 

이러한 원시반사는 생후 6개월이 되면 없어지고, 새로운 행동을 익힌다.

또, 이 시기에 대뇌피질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아기는 표상(이미지)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이 '어떠한 것이다'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기억속에 저장하는 것이지.


 


 

이렇게 표상을 생성할 수 있는 덕분에, 친한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자주 보는 사람은 이 사람은 '자주 보는사람(친한사람)'이라는 표상을 만들고,

모르는 사람은 '생판 처음보는 사람' 이라는 표상을 만들어서 서로 구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를 경계로 아기는 낯을 가리게 된다.




 

선천적으로 '미소' 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우리 아기들이 더 귀여운 것 아닐까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이유  (0) 2019.08.15
조선의 식인풍습  (0) 2019.08.15
알아두면 재미있는 상식  (0) 2019.08.15
[펌]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서 위안부 관련  (0) 2019.08.15
소주를 통해 본 술  (0) 2019.08.14

1. 빅파이

 

 

 


 

빅파이는 ‘Big pie’가 아니라 ‘Vic(Victory의 줄임말) pie’다.

 

 

 

2. 미란다

 

 

 

 

 

이 오래된 음료의 이름은 미’란’다가 아니라 미’린’다이다.

이름인 '미린다'(Mirinda)는 에스페란토어로 '굉장하다'(wonderful)이라는 뜻이다.

 

'미란다 원칙' 이랑 비슷해서 헷갈려한다

 

미란다 원칙( - 原則, 영어: Miranda warning,Miranda rights, Miranda rule)이란

수사기관이 범죄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 이유와 변호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음을 미리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3. 오징어칩

 

 

 


 

이 과자의 이름은 오징어’칩’이 아니라 오징어’집’이다.

 

 

 

4. 히틀러는 독일인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다.

(1932년 공식적으로 독일인으로 귀화를 했을 뿐 태생자체는 오스트리안)

 

 

 

5. 프리 마돈나

 

 

 


 

오페라의 주역 여가수를 뜻하는 프리마돈나는 ‘프리 마돈나(Pri madonna)’가 아니라 ‘프리마 돈나(Prima donna)’이다.

프리마(prima)는 으뜸, 첫째라는 의미이고 돈나(donna)는 여성, 숙녀라는 의미다.

 

 

 

6. 스위트룸

 

 

 


 

스위트룸은 ‘Sweet room(달콤한 방)’이 아니라 ‘Suite room(갖춰진 방)’이다.

모든 시설(욕실,거실 등이 딸린)이 완비된 객실을 뜻한다. SUITE는 ‘한 벌’, ‘갖춰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7.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라 ‘다 빈치(Da Vinci)’, 다 빈치는 성이 아니라 ‘빈치(Vinci)’ 출신이라는 뜻이다.

 

 

 

8. '호랑이' 는 순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이고  '범' 이 순 우리말이다.

 

 

 


 

'호랑(虎狼)'

 

 

 

9. 카톨릭X    가톨릭O

 

 

 


 

천주교(Catholic)는 ‘카톨릭’이 아닌 ‘가톨릭’이다.

영어로는 ‘캐설릭’에 가깝지만 천주교는 라틴어를 기준으로 하기에 ‘가톨릭’을 공식 표기로 정했다.

 

 

 

10. 도대체

 

 

 

 

 

도대체(都大體)는 한자어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식인풍습  (0) 2019.08.15
아기의 미소, 의미  (0) 2019.08.15
[펌]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서 위안부 관련  (0) 2019.08.15
소주를 통해 본 술  (0) 2019.08.14
위안부 문옥주할머니 증언집 中  (0) 2019.08.14

원문 및 출저 :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0568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

 

1 Oct 1944

1944101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인디아-버마 전역에 부속된

 

미합중국

전쟁 정보국

심리전팀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Interrogated: Aug. 20 - Sept. 10, 1944  
심문 일자 : 1944820- 910

 

Date of Report: October 1, 1944

보고 일자 : 1944101


By: T/3 Alex Yorichi

심문 주체 : 알렉스 요리치

Prisoners: 20 Korean Comfort Girls

포로 :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


Date of Capture: August 10, 1944

생포 일자 : 1944810


Date of Arrival: August 15, 1944

도착 일자 1944815
at Stockade  

 

 



PREFACE

서문

This report is based on the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 interrogation of twenty Korean "comfort girls" and two Japanese civilians captured around the tenth of August, 1944 in the mopping up operations after the fall of Myitkyina in Burma.


이 보고서는 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 소탕 작전 중 810일에 포로가 된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2명의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심문으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The report shows how the Japanese recruited these Korean "comfort girls",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lived and worked, their relations with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soldier, and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litary situation.

 

이 보고서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 "위안부들"을 어떻게 모집했으며,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했으며, 그들의 일본 군인과의 관계와 군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or "professional camp follower" attached to the Japanese Army for the benefit of the soldiers. The word "comfort girl" is peculiar to the Japanese. Other reports show the "comfort girls" have been found wherever it was necessary for the Japanese Army to fight. This report however deals only with the Korean "comfort girls" recruited by the Japanese and attached to their Army in Burma. The Japanese are reported to have shipped some 703 of these girls to Burma in 1942.


"위안부"는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붙여진 창녀 혹은 "직업적인 종군 민간인"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 comfort girl'이란 용어는 일본인들 특유의 표현이다. 다른 보고서들도 이 "위안부들"이 전투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필요한 어느 곳이든 발견됨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일본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마의 그들 군대에 붙여진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일본인들은 1942년에 버마로 이러한 위안부들을 703명 가량 데려왔다고 보고된다.

 


RECRUITING
모집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을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 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엔의 보상을 받았다.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여자들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무학이었는데개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 그녀들이 서명한 계약은 미리 선금으로 지급된 가족 연대채무의 액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녀들을 위안소 업자와 군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였다.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Japanese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대략 800여명의 이 여자들은 위의 방법으로 모집되었으며 그들은 820일 즈음에 랭군에 일본인 '위안소 업자 house master'들과 함께 상륙하였다. 그들은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주로 일본군 병영 근방의 규모있는 도시에 배치되었다.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이들 그룹 중 네 그룹은 미트키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게 될 위안소들의 이름은)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였다. 쿄에이 위안소는 원래 "마루야마 클럽"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가 해당 위안소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여 이 여성들이 도착하기 전에 개칭되었다.

 


PERSONALITY

인성

The interrogations show the average Korean "comfort girl" to be about twenty-five years old, uneducated, childish, and selfish. She is not pretty either by Japanese of Caucasian standards. She is inclined to be egotistical and likes to talk about herself. Her attitude in front of strangers is quiet and demure, but she "knows the wiles of a woman." She claims to dislike her "profession" and would rather not talk either about it or her family. Because of the kind treatment she received as a prisoner from American soldiers at Myitkyina and Ledo, she feels that they are more emotional than Japanese soldiers. She is afraid of Chinese and Indian troops.

 

심문은 평균적인 한국인 "위안부"가 대략 25세 내외이며, 무학이며, 유치하며, 이기적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본인 혹은 코카시안의 기준으로도 예쁘지 않다. 그녀는 자기중심적이며 그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낯선 자들 앞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조용하며 점잖빼는 모습이지만,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그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미트키나와 레도에서 미군으로부터 포로로서 받은 친절한 대접 때문에, 그녀는 미군이 일본군에 비해 보다 정에 무르다고 느낀다. 그녀는 중국군과 인도군을 두려워한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PRIOR SYSTEM

(이용의) 우선순위 시스템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transacted business were regulated by the Army, and in congested areas regulations were strictly enforced. The Army found it necessary in congested areas to install a system of prices, priorities, and schedules for the various units operating in a particular areas. According to interrogations the average system was as follows:

 

그들이 일하는 조건은 군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위안소 이용이 많아붐비는 지역에서는 규칙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군은 이용이 붐비는 지역에서 (직위에 따른차등 가격, (직위에 따른 위안소 이용의) 우선 순위, 특정 지역에서 작전하는 다양한 부대의 스케쥴 등을 고려한 위안소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1. Soldiers

10 AM to 5 PM

1.50 yen

20 to 30 minutes

2. NCOs

5 PM to 9 PM

3.00 yen

30 to 40 minutes

3. Officers

9 PM to 12 PM

5.00 yen

30 to 40 minutes

 

 

1. 사병 : 오전 10시에서 오후 5. 1회 이용 시간 20분에서 30. 요금 1.5

 

2. 하사관 : 오후 5시에서 오후 9.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 요금 3

 

3. 장교 : 오후 9시에서 자정.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 요금 5 

 


These were average prices in Central Burma. Officers were allowed to stay overnight for twenty yen. In Myitkyina Col. Maruyama slashed the prices to almost one-half of the average price. 

 

위의 요금은 중부 버마에서 평균 가격들이었다. 장교들은 20엔을 내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미트키나에서 마루야마 사령관은 위안소의 요금을 평균 가격의 거의 절반으로 깎아버렷다.

 


SCHEDULES

일정

The soldiers often complained about congestion in the houses. In many situations they were not served and had to leave as the army was very strict about overstaying. In order to overcome this problem the Army set aside certain days for certain units. Usually two men from the unit for the day were stationed at the house to identify soldiers. A roving MP was also on hand to keep order. Following is the schedule used by the "Kyoei" house for the various units of the 18th Division while at Naymyo.


병사들은 종종 위안소가 붐비는 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많은 상황에서 그들은 이용을 하지 못하였으며, 군은 이용 시간 초과에 대해 매우 엄격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은 특정 부대에 대해 특정 이용 일자를 지정하였다. 대개 부대에서 2명이 차출되어 위안소에 상주하며 병사들의 신원을 (위안소의 중복 이용를 하지 못하도록) 확인하였다. 위안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헌병 또한 순찰하였다. 아래는 나이묘의 제 18사단의 여러 부대에 대해 쿄에이 위안소에서 사용된 일정이다.

 

Sunday

18th Div. Hdqs. Staff

Monday

Cavalry

Tuesday

Engineers

Wednesday

Day off and weekly physical exam.

Thursday

Medics

Friday

Mountain artillery

Saturday

Transport

 

 

일요일 :  18사단 사령부

 

월요일 : 기병대

 

화요일 : 공병대

 

수요일 : 휴일 겸 주간 신체 검사

 

목요일 : 의무병대

 

금요일 : 산악 포병대

 

토요일 : 수송부대

 


Officers were allowed to come seven nights a week. The girls complained that even with the schedule congestion was so great that they could not care for all guests, thus causing ill feeling among many of the soldiers.

 

장교들은 일주일 중 아무 날이나 이용이 가능하엿다. 여성들은 이러한 (지정일이 있는스케쥴에도 불구하고 붐빔이 너무 심하여 모든 손님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기분이 나쁘게 되었다고 불평하였다.

Soldiers would come to the house, pay the price and get tickets of cardboard about two inches square with the prior on the left side and the name of the house on the other side. Each soldier's identity or rank was then established after which he "took his turn in line". The girls were allowed the prerogative of refusing a customer. This was often done if the person were too drunk.

 

군인들은 위안소에 와서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는데, 표는 2인치 정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왼쪽에는 직급이 찍혀 있고 오른 쪽에는 위안소 명칭이 적혀 있었다. 각 군인의 직급은 그가 어느 줄에 설 지 결정한 다음 확인되었다. 위안부들은 고객을 거절하는 특권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종종 고객이 너무 취했을 때 발생하였다.


PAY AND LIVING CONDITIONS

급여와 거주 조건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위안부 업자는 여성들이 처음 계약시 받은 돈(선대금)이 얼마냐에 따라 위안부들의 총수입의 50에서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였다. 이는 평균적인 한 달 동안 한 위안부가 1,500엔 가량의 수입을 올리며 이 중 750엔을 업자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업자들은 식료품이나 기타 물품을 위안부들에게 고액을 받고 팔아 이 여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1943년 후반에 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위안부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추가적인 심문은 이 여성들의 건강이 매우 좋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피임 기구들을 잘 공급받았으며, 종종 병사들이 군에서 지급받은 피임도구들을 지참하고 왔다. 위안부들은 자기 자신들과 고객들을 위생이란 측면에서 세심하게 보살피도록 교육받았다. 일본군 군의관이 주 1회 정기적으로 위안소를 방문하였고 병에 걸린 여성이 발견되면 누구든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동일한 과정은 군대 자체에도 적용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군인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간에도 (위안부와 달리) 월급을 지급받았다는 점이다.

 


REACTIONS TO JAPANESE SOLDIERS

일본 군인들에 대한 반응

In their relations with the Japanese officers and men only two names of any consequence came out of interrogations. They were those of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and Maj. Gen. Mizukami, who brought in reinforcements. The two were exact opposites. The former was hard, selfish and repulsive with no consideration for his men; the latter a good, kind man and a fine soldier, with the utmost consideration for those who worked under him. The Colonel was a constant habitu of the houses while the General was never known to have visited them. With the fall of Myitkyina, Col. Maruyama supposedly deserted while Gen. Mizukami committed suicide because he could not evacuate the men. 

 

일본군 장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에서는 단지 2명의 의미있는 이름만이 등장하엿다. 그들은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 대좌과 증원부대로 온 미즈아키 소장이었다. 이 둘에 대한 (위안부들의) 평판은 정반대였다. 마루야마 대령은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혐오스러웠으며 부하들에 대해 배려가 전혀 없었다. 미즈아키 소장은 선하고 친절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자기 밑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앞에서 말했듯이 위안소 요금을 절반으로 낮추어 업자와 위안부들의 원성을 샀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위안소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나, 미즈아키 소장은 한 번도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위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트키나 함락 때 마루마야 대좌는 아마도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즈아키 소장은 부하들을 탈출시키지 못한 책임감으로 자살하였다.

 

 

SOLDIERS REACTIONS
군인들의 반응


The average Japanese soldier is embarrassed about being seen in a "comfort house" according to one of the girls who said, "when the place is packed he is apt to be ashamed if he has to wait in line for his turn". However there were numerous instances of proposals of marriage and in certain cases marriages actually took place.

 

평균적인 일본군은 '위안소'에 나타나는 것을 당황스러워하였다. 한 위안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위안소가 붐빌 때 (군인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군인들이 위안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위안부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All the girls agreed that the worst officers and men who came to see them were those who were drunk and leaving for the front the following day. But all likewise agreed that even though very drunk the Japanese soldier never discussed military matters or secrets with them. Though the girls might start the conversation about some military matter the officer or enlisted man would not talk, but would in fact "scold us for discussing such un-lady like subjects. Even Col. Maruyama when drunk would never discuss such matters." 

 

모든 위안부들은 가장 최악의 고객은 만취한 자들과 다음날 전선으로 떠날 사람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였다. 그러나 비록 술에 취했을 경우에도 일본군은 그 누구도 결코 군 내부의 문제나 기밀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위안부들이 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장교들은 그에 응하지않았고 때로는 "여성 답지 못한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한다. 마루야마 대좌조차도 취했을 때에도 그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The soldiers would often express how much they enjoyed receiving magazines, letters and newspapers from home. They also mentioned the receipt of "comfort bags" filled with canned goods, magazines, soap, handkerchiefs, toothbrush, miniature doll, lipstick, and wooden clothes. The lipstick and cloths were feminine and the girls couldn't understand why the people at home were sending such articles. They speculated that the sender could only have had themselves or the "native girls". 

 

군인들은 종종 고향으로부터 편지, 잡지, 신문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위안부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또한 통조림, 잡지, 비누, 손수건, 치솔, 인형, 립스틱옷감 등이 들어있는 "위문 가방"을 받았다고 위안부들에게 말하였다. 립스틱와 옷감은 여성용이라서 위안부들은 왜 고향 사람들이 이러한 물건을 군인들에게 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해당 물건을 보낸 발송인이 아마도 군인들의 애인일 것이라서 (사용하던 물건을 보낸 것이라추측하였다.

 


MILITARY SITUATION

군의 상황

 

"In the initial attack on Myitkyina and the airstrip about two hundred Japanese died in battle, leaving about two hundred to defend the town. Ammunition was very low. 

 

미트키나와 활주로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서 2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하였고 그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2백명을 남겨두고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탄약은 매우 부족하였다.


"Col. Maruyama dispersed his men. During the following days the enemy were shooting haphazardly everywhere. It was a waste since they didn't seem to aim at any particular thing. The Japanese soldiers on the other hand had orders to fire one shot at a time and only when they were sure of a hit." 

 

마루야마 대좌는 부하들을 넓게 산개시켰다. 다음 날 적군(미군)은 모든 곳에서 위험스러운 총격을 가했으나 특정한 목표를 겨눈 것이 아니라서 (탄약의) 낭비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적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만 (연사하지 않고) 1회씩 발사하도록 명령받았다.


Before the enemy attacked on the west airstrip, soldiers stationed around Myitkyina were dispatched elsewhere, to storm the Allied attack in the North and West. About four hundred men were left behind, largely from the 114th Regiment. Evidently Col. Maruyama did not expect the town to be attacked. Later Maj. Gen. Mizukami of the 56th Division brought in reinforcements of more than two regiments but these were unable to hold the town. 

 

적이 서쪽 활주로를 공격하기 전에, 미트키나 주둔 병사들은 북부와 서부 쪽의 연합군에게 강습을 가하기 위해 어딘가로 파송되고 있었다. 대략 400명의 병사가 남겨졌는데 주로 제 114연대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분명 그 도시가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제 56 사단의 미즈아키 소장이 2개 연대 이상의 증원군을 제리고 왔으나 그들로서도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It was the consensus among the girls that Allied bombings were intense and frightening and because of them they spent most of their last days in foxholes. One or two even carried on work there. The comfort houses were bombed and several of the girls were wounded and killed.

 

연합군의 폭격이 맹렬하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위안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을 대부분 방공호에서 보냈다. 한 두 명은 그 와중에도 일을 수행하였다. 위안소도 폭격을 받았으며 위안부 중 몇몇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RETREAT AND CAPTURE

퇴각과 생포


The story of the retreat and final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is somewhat vague and confused in their own minds. From various reports it appears that the following occurred: on the night of July 31st a party of sixty three people including the "comfort girls" of three houses (Bakushinro was merged with Kinsui), families, and helpers, started across the Irrawaddy River in small boats. They eventually landed somewhere near Waingmaw, They stayed there until August 4th, but never entered Waingmaw. From there they followed in the path of a group of soldiers until August 7th when there was a skirmish with the enemy and the party split up. The girls were ordered to follow the soldiers after three-hour interval. They did this only to find themselves on the bank of a river with no sign of the soldiers or any means of crossing. They remained in a nearby house until August 10th when they were captured by Kaahin soldiers led by an English officer. They were taken to Myitkyina and then to the Ledo stockade where the interrogation which form the basis of this report took place.

 

퇴각과 최종적으로 사로잡히게 된 과정을 이야기할 때 위안부들은 다소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워보였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 731일 밤에 세 위안소(이때 바쿠신로 위안소는 킨스이 위안소와 통합된 상태였다)의 위안부들, 여러 가족들, 보조자들이 포함된 63명의 일행이, 작은 보트에 나누어타고 이라와디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내 와잉마우(Waingmaw) 근처의 어딘가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에서 84일까지 머물렀는데, 와잉마우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부대를 따라갔는데 87일에 소규모 접접이 일어나면서 일행이 쪼개지게 되었다. 위안부들은 3시간 간격을 두고 군인들을 따르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명령을 따랐으나 마침내 어느 강둑에서 병사들을 놓치고 강을 건널 수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근처의 가옥에서 810일까지 머무르다가 영국 장교가 인솔하는 카힌 부대(인도인 현지 부대인 듯 하다)에 의해 생포되었다. 그들은 미트키나로 이송된 후 다시 레도 진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이 보고서의 기반이 되는 심문이 진행되었다.


 
REQUESTS

요청들

None of the girls appeared to have heard the loudspeaker used at Myitkyina but very did overhear the soldiers mention a "radio broadcast."

 

여성들 중 누구도 미트키나에서 사용된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했으나 군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언급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은 있었다(미군의 심리전 방송을 말하는 듯).


They asked that leaflets telling of the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should not be used for it would endanger the lives of other girls if the Army knew of their capture. They did think it would be a good idea to utilize the fact of their capture in any droppings planned for Korea.

 

그들은 "위안부들"을 생포했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일본군에게) 뿌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만약 일본군 측이 그들의 생포를 알게 되면 (부대에 있는) 다른 위안부들의 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포 사실이 한국에 살포하기로 계획된 전단지에 활용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1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2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3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4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5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6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7페이지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기의 미소, 의미  (0) 2019.08.15
알아두면 재미있는 상식  (0) 2019.08.15
소주를 통해 본 술  (0) 2019.08.14
위안부 문옥주할머니 증언집 中  (0) 2019.08.14
군함의 위장색  (0) 2019.08.12

 

 

사람마다 "맥주는 괜찮아" "막걸리는 음료수야" "그냥 소주 한 병인데 뭘"

"양주는 쌔니까 천천히 마셔야되"  같은 음주 철학이 있는데,

솔직히 정확한 음주량이 환산이 안되서 마시다가 몸이 무너지는 경험들 다들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주를 기준으로, 각 술들이 얼마만큼의 전투력(알콜량)을 보유했는지를 알아보고 

자신에 주량에 맞는 음주량을 체크 해보도록 할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술의 종류들과 그 도수 등을 나타낸 표이다.

각각의 도수는 평균적인 도수를 써놓은 것이고 약간의 도수차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개략적인 알콜량을 아는게 목적이니 대충 근사값으로 넘어가자.

 

 

 

1. 저알콜 계열

 

 

많이들 오해하는게 맥주나 막걸리는 몇 잔씩 마셔도 소주 마시는 것 보다 낫다라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맥주 500cc 한 잔이면 소주 1/3에 버금가니,

3잔쯤 마시면 소주 한 병을 마신 것과 같은 알콜량을 섭취하게 된다

 

.

막걸리는 결코 알콜량이 적지 않은 술이다. 막걸리 3병이면 소주 2병을 마신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대게들 막걸리 사발에 두번에서 세번 정도 먹는 양이 얼마나 대수겠는가 하는데

사실 막걸리 4~5잔 이면 소주 1병을 마신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저알콜 술이 위험한게, 소주는 차라리 애들이 많이 먹고 데여봐서 서서히 먹는데

이런 술은 분위기타고 여자던 남자던 쉽게쉽게 마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보면 한 사람당 막걸리 3병씩 대수롭지 않게 먹고 있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통에 담겨서 온다면?

 

 

 

 

 

저거 하나에 양심적인 가게라면 막걸리 3통 들어가는데, 대략 소주 2병 정도 라고 보면된다.

예컨데, 막걸리 마셔서 숙취가 더 하다?

이건 곡주라서 소화가 더부룩 할 수 도 있지만, 대가리가 아픈건 엄연히 알콜을 많이 처먹어서 그런게 더 크다.

 

 

 

2. 고알콜 계열

 

 

 


 

와인은 그냥 구색 맞추려고 넣었다. 와인을 앉은 자리에서 두 병씩 처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서 관건은 소주의 파괴력이다. 일반적인 술 초짜들이 위스키는 강하다, 소주는 약하다 라는 선입견을 갖는데

소주는 사실 "매우 강력한 주류"다. 소주 2병을 마시는 것은 위스키 큰거 반병을 처먹은것과 같다.

 

 

예를들어서 앉은자리에서 소주 4병을 처먹는 것은

데낄라나 보드카 1병을 앉은 자리에서 혼자 까먹었다는 거랑 똑같은 소린데, 사실 그건 개구라일 확률이 높다. 

자기가 정신을 차리니 지 앞에 소주 4병이 보여서 주량이 4병이라고 보는거지

소주 4병을 혼자 까는거는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짧게 주종별 도수에 대해 알아봤다. 알고 맛있게 먹자.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아두면 재미있는 상식  (0) 2019.08.15
[펌]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서 위안부 관련  (0) 2019.08.15
위안부 문옥주할머니 증언집 中  (0) 2019.08.14
군함의 위장색  (0) 2019.08.12
명성황후의 진실  (2) 2019.08.10



태국 - 베니스 비엔날레 비상설국 국가관 없음
중국 - 베니스 비엔날레 비상설국 국가관 없음







태국 - 무에타이 [최근 IOC 올림픽 공식 종목 인정 서류 제출 중국 쿵푸와 라이벌]
중국 - 쿵푸 [ 아시안 게임 공식 종목, 태국 무에타이와 라이벌]



태국 카에틴코이
중국 웨민진







태국 유럽에 식민지배 당한 적 없음
중국 유럽에 반식민지배 당함

랑군 시장에는 보석가게도 있었다. 버마는 보석이 많이 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루비나 비취가 특히 싼 편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보석을 많이 모으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하나정도는 가지고 있는게 좋을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다이아몬드를 사기도 했다. 일본의 활동사진이나 일본에서 온 가부키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가부키는 배우들이 의상을 여러 개 겹쳐 입고 있던 것과 남자배우가 여자 역할을 하던 것이 신기했다.

 

 

 

어쩌다 모처럼 놀러 왔으면서도 방구석에 방구석에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꿇어 앉아 있는 젊은 병사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상관에게 얻어맞았다거나 해서 엄청 속이 상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술을 살게요 하고 술을 사서 마시도록 해주었다. 그런 일은 곧바로 부대에서 소문이 퍼졌던 모양으로 며칠 뒤면 반드시 그 병사의 상관인 사람이 와서 표를 한 두장 여분으로 놓고 돌아가곤 했다. 그럴 때면 팁도 쥐어 주었다.

 

 

 

그 당시 천원이면 대구에서 작은 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

 

 

 

저금해 둔 돈 중에서 5천 엔을 송금했다. 담당하는 병사에게 물어보니 "저금이 있다면 전부 보내는 게 좋을 걸." 이라고 했지만, 나는 "남은 돈은 조선에 돌아가서 출금할 거니까 괜찮아요."라고 대답하고 전부 부치진 않았다. 우선 부친 돈이 제대로 도착할지가 걱정이었고, 겨우 모은 저금이 없어지는 것도 왠지 불안했다.

 

 


우리가 사이공에 있었던 그 때가 우기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사이공에서 레인코트를 샀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레인코트는 프랑스산으로 아주 산뜻한 녹색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녹색이라 그 레인코트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디자인은 특별한 것이 없었으나 타는 듯한 녹색이 아주 멋졌다.

나는 악어가죽 핸드백에 하이힐을 신고 녹색 레인코트를 입은 멋진 차림으로 사이공의 거리를 활보했다. 아마 누가 보더라도 내가 위안부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주 그립고 그때의 자신만만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일본군 전쟁포로 심문 보고서 위안부 관련  (0) 2019.08.15
소주를 통해 본 술  (0) 2019.08.14
군함의 위장색  (0) 2019.08.12
명성황후의 진실  (2) 2019.08.10
이승만에 대한 진실2  (0) 2019.08.10

 


 

군함들의 위장색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멋진 군함들을 한번 보자


 



 

전함부터 항공모함까지 여러가지 포지션을 가진 멋진 군함들이 있다.

근데 군함을 보다보면 모두 비슷한 점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대부분 '회색' 계통의 색을 띠고 있다는 거야.

그 이유인 즉슨, 회색은 바다에서 가장 뛰어난 위장색이어서 많이 사용하는 것.





 

하지만 바다니까 파란색이 더 위장에 효과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겠지만,


 



 

회색은 수평선의 색과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회색은 무채색이기도 해서 분간하기도 어렵고,





 

여기에 바다에선 흔한 해무마저 끼면 수평선 너머에 있는 군함을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이 정도는 여름철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해무로

저기 수평선 너머에 회색 군함이 있다면 정말 찾기 힘들 것으로 사료된다.

이렇게 회색은 바다에서 가장 적합한 위장색이지만, 한때는 다른 위장이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줄무늬 모양은 다즐(dazzle) 위장이라는 건데,

1차 대전 때 유보트에 하도 쳐맞아서 만들어낸 위장이라 한다.

 

이때 당시 어뢰 공격 방식은 발사해서 직접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측샷이었기 때문에

배의 앞/뒤를 헷갈리게 만들어서 진행 방향 / 속도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이런 위장이 탄생했다는 것.
 




 

그 위장의 취지에 맞게 앞뒤 구분이 잘 가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위장은 어디에서 기인한 아이디어일까?





 

다즐 위장(Dazzle Camouflage) 은 보다시피 얼룩말의 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위장은 본래 물체를 주위 환경에 결부시켜 눈에 띄지 않게 하기위한 것이며,

그 정의에서 보면 다즐 위장은 반대로 관심을 끌기위한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지만





 

함선을 완전히 눈에 띄지 않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적을 상대로 함선의 함종, 규모, 속도, 진행 방향 등의 파악을 어렵게 만들고

광학 거리계에 따른 함포 사격, 어뢰 공격을 방해할 목적으로 고안된 다즐 위장은

함선을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을 혼란시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뱃머리에 물결을 그려놓은 위장도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장들은 분명 어떤 위치에서 공격을 할 것이냐 하는 적의 판단에 혼란을 유발하는 것.

이후 레이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식의 위장은 점점 사라지고 회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모든 군함이 모두 회색계열인건 아니다.

위 사진의 후베이급 고속함처럼 예외도 있긴 하다.

임무에 따라 연안경비등이 목적이면 다른 색으로 도색하기도 한다.
 


 


 

대한민국 해양경찰 소속 함정들은 모두 흰색이다.

위장의 목적이 아니라 도리어 눈에 잘 띄어야 하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주를 통해 본 술  (0) 2019.08.14
위안부 문옥주할머니 증언집 中  (0) 2019.08.14
명성황후의 진실  (2) 2019.08.10
이승만에 대한 진실2  (0) 2019.08.10
이승만에 대한 진실3  (0) 2019.08.10

홍콩 민주화 시위 YTN

 

 

홍콩 송환법 반대 민주화 시위가 중국 공산당의 무시와 강경진압으로 사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홍콩의 경제는 22년만에 최악의 상황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과 더불어

어젯밤은 그 진압의 강도가 심해졌고 홍콩의 젊은이들은 매우 슬퍼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실명한 홍콩 여성


 

1. 시위대에 최루탄을 정면 발포해 여성 시위자 실명함

 

 

 


 

2. 경찰이 대놓고 검은옷입고 시위대에 섞여 난장판을 만드는 중

 

 

 


 

 

3.지하철 역사 내에 최루탄 발포, 무고한 시민들도 그 피해를 입고 있는 중

 

 

 

지하철 역사 내 최루탄 발포


 

4. 복건성 출신 대륙 중국인들이 단체로 시위대를 위협하고자 대낮부터 봉들고 무력시위하는데 방관함

(지난번 시위대에 각목 휘두르고 난장판된 지역)

 

 

 


 

5. 지하철에서 무려 시위대 1미터 앞에서 최루탄 직격발포, 시위대 무차별 구타함

 

 

 


 

이 모든 장면은 기자들이 동영상 촬영해 페이스북에 공유 중.

시위가 계속되자 무차별 폭력을 휘드르는 정부는 "폭력적인 폭도들을 엄벌에 처하겠다"며 경고...

 

 

 

 


"바퀴벌레 새끼들아 꺼져라!"를 외치는 경찰들

 

 

그 누구보다 민주화에 열광하고, 민주화를 자랑스러운 유산이라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현 여당과 정부는 왜 아무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왜 중국 정부의 비민주적인 태도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이 없는가?

왜 국내 언론들은 이리도 홍콩의 민주화 욕에 대해 무관심한가?

 

 

 

대통령 부터가 인권 대통령이라 타이틀을 내걸고 북한 인권에는 무관심하고,

중국몽을 따라가겠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윤희 임명  (0) 2019.12.19
엄용수 의원직 상실  (0) 2019.11.15
조국 유성엽 만남  (0) 2019.09.17
은성수 아들 감추기  (0) 2019.08.28
황장엽의 반일운동 예언  (0) 2019.08.12

크로아티아 크르카 국립공원  인터파크투어
크로아티아 크르카 국립공원 투어팁스

 

크로아티아의 크르카 국립공원에서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관광객 두 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현지 매체 RTL 등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크로아티아 크르카강 YTN

 

 

보도에 따르면 전날 오후 크로아티아 남동부에 있는 국립공원 내 크르카 강에서

남성과 여성의 시신이 한 구씩 발견됐다.

 

 

 

크로아티아 크르카 국립공원의 위치

 

 

시신은 현재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상태이며 정확한 신원과 사망 원인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여성의 소지품은 발견됐지만, 남성의 소지품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현지 매체들은 보도했다.

 

 

크로아티 국영방송 HRT

 

 

국영 방송 HRT는 이들 남녀가 아시아계라고 보도했다.

RTL은 이들이 한국인이고 여성의 나이는 21세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승우 벨기에 신트트라위던  (0) 2019.08.28
태국과 중국의 문화파워 비교  (0) 2019.08.14
여성들이 부자가 되는 방법  (0) 2019.08.11
세계 미디어그룹 TOP5  (0) 2019.08.09
러시아 여자배구 인종차별  (2) 2019.08.07

황장엽의 반일운동 예언

 



일본 갓끈 떨어졌고 미국 갓끈만 끊으면 연방제 통일 완성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공산화가 되면....

1975년 4월30일의 월남 패망 직후의 상황 - 탈북자들의 진술을 조합한 내용

1. 인구조사와 주택조사와 재산조사를 일거에 해버린다.
모든 재산은 매매를 동결시킨다. 팔면 처형된다. 

2. 거주지간의 이동을 금지하며 허가받은 자만이 이동할 수 있다.

3.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담당자 책임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4. 불평불만한 자, 허가와 사전승인을 무시하는 자를 공개 처형하며 공개 처형장은 인근학 교 운동장에서 한다.

5. 1가구 2주택 이상 소유자, 재산1억이상 소유자, 놀고 먹는자 등을 사회범죄자(술주정뱅 이,강도 강간자, 소문이 안 좋은자 등등)로 간주하여 집단 처형해버린다.

6. 모든 물건은 배급제로 한다(식량, 물까지)

7. 전직공무원, 군인(하사관이상) 경찰들은 재 교육장으로 끌고 가서 강제노동으로 살게한다
(대부분 5년 이내 사망함-월남)

8. 말 함부로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데려가서 처형한다.

9. 모든 공개 처형은 재판 없이 즉결심판으로 실시한다.

10.남한의 아파트와 집들은 전부 북한노동자들이 차지한다.

11.살아남은 대부분의 남한사람들은 북한 땅으로 강제 이주되어 재건작업에 투입된다
(3년내 50%이상 사망 확실)

12.기술자들은 북한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기술을 인수인계 후에 이주시킨다.

13.전체적으로 남한인구가 3천만으로 줄 때까지 처형과 강제 노동이 지속된다.

14.시체는100% 화장해 버린다.

송두율은 김정일의 지시로 1978년에 독일 베르린 대학교에서1941-43년간
유태인 강제소각장 운영과 전후 처리 후 결과에 대한 논문으로 대략학살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이북에 제출했다.

15.남한출신들은 100년간 통일 조국에서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 금지된다.

16.외국과의 모든 교신과 교환거래는 금지되며 인민위에서 인정하는 것만 승인된다.

17.뉴스는 정해진 시간외에는 일체 들을 수 없다.

18.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감시기관에서 자살방지를 위한 상호감시 체제가 극에 달한다.

19. 예수 믿는 자들(기독교인들) 우선 처형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소련의 스탈린은 공산혁명을 위해 4,500만명을 죽였고,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은 6,300만명을 죽였고,
북한의 김일성은 700만명을 죽였고...
역사상 모든 공산국가 독재자들이 다 그래 왔다.
(즉, 공산혁명의 세계적 매뉴얼임)

 


김정일은 생전에 말하기를,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달성 시 (남한의) 1천만 명은 이민 갈 것이고, 2천만 명은 숙청될 것이며,

남은 2천만 명과 북한 2천만 명으로 공산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함락된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은 물론,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벌이며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짠후탄’ 신부 등 종교인, 교수, 학생 및 통일 운동가들까지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졌고,

대부분 처형되는 등 수백만 명이 처형 학살되었다.

 

 


‘리 라닝’(‘베트콩과 월맹의 내막’ 저자)의 증언:

“베트콩으로 활동한 월남인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일부는 재교육 수용소에 월남인 적들과 함께 수용해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월남 패망에 앞장섰던 인사들까지 처형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짓(변절,반역)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이 행하는 잔인무도한 혁명전술전략이다!

 

 


우리나라도 만약 공산화되면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산혁명 역사상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이 다 그랬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구소련의 스탈린, 중국공산당 모택동, 북한 김일성 등이 다 그랬다.

'정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윤희 임명  (0) 2019.12.19
엄용수 의원직 상실  (0) 2019.11.15
조국 유성엽 만남  (0) 2019.09.17
은성수 아들 감추기  (0) 2019.08.28
홍콩 시위 근황  (0) 2019.08.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