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사용해서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삶에 녹아있는 당연한존재인 달력. 왜 지금과 같이 정해졌을까?
아마 학교에서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이라고 들어는 봤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그레고리력이지만 이 모든 기본은 로마제국의 줄리우스 시저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에서 왔다.
고대 로마공화정 초창기엔 고대 이집트의 역법시스템을 보완한 태음력을 사용했는데 십진법을 좋아했던 로마인들은
1년에 달을 10개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10월이 끝난 후 50여일을 달 없이 보낸 후 다시 1월을 맞이하는 구조여서
언제부턴가 2개의 달을 추가, 다음과 같은 구조의 12개월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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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 Length (days)
Martius 31
Aprilis 29
Maius 31
Iunimus 29
Quintilis 31
Sextilis 29
September 29
October 31
November 29
December 29
Ianuarius 29
Februarius 28
Februaris (Leap year) 23
Intercalaris(Leap year)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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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의 Quintilis와 Sexilis만 제외하고 지금 쓰이는 달의 영어식 표현들과 같거나 비슷해보인다.
고대로마의 라틴어식 표현이 현재영어에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
이 고대 로마공화정 역법에 따르면 윤년(Leap year)는 2년에 한번씩 돌아왔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4년 주기의 반복이었다.
355일 -> 377일 -> 355일 -> 378일
태양의 사이클과 달의 사이클을 맞추려고 노력한건데 복잡하기도 하고,
한해의 길이가 매년 크게차이나는 단점이 있었고,
근본적으로 달과 태양의 움직임이 전혀 달라 이 둘을 맞추려는 노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로마 공화력의 실제 모습 (BCE 60)
그래서 보다못한 시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천문학자인 소시게네스(Sosigenes)에게 부탁해
달을 포기하고 태양의 움직임에만 신경쓴 태양력을 만들게 된다.
그 바뀐 태양력이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과 동일하다.
4년마다 한번씩 윤년이 있어서 2월이 28일에서 29일로 바뀌게 되는 것.
그렇게 되면 평균적으로 1년이 365.25일이 되는데
이는 실제 천문학적 회귀년인 365.2422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게되어 128년에 한번씩 1일의 편차가 나게 되어있어.
우리에게 현재 달력을 선사한 줄리우스 시저 Turin Archaeological Museum, Italy
지금 쓰는 달의 영어 명칭은 로마공화력에서 쓰던 명칭과 대략 비슷한데 몇개 달라진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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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월): 두얼굴의 신으로 유명한 로마 시작의 신 (god of beginning) Janus의 달
February (2월): 로마시대 2월 중순에 열렸던 정제의 축제 (feast of purification) Februa의 달
March (3월): 로마 전쟁의 신 Mars의 달
April(4월): 그리스 미의 여신 Aphrodite의 달
May(5월): 그리스 봄의 여신 Maia의 달
June(6월): 로마 신들의 여왕 Juno의 달
July(7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반란세력에게 암살당한 BCE 44년 로마 상원의원들이 카이사르를 기리기위해 원래 5번째 달이란 뜻의 Quintilis를 개명, Julius 의 달로 지정
August(8월): 로마 초대황제 Augustus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원래 6번째 달인 Sextilis를 자신의 달로 만듬. 왜 8월로 정해졌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진 않은 가운데 여러 설이 있다. 그중 유력한 하나로 로마시대 역사가인 Macrobius에 따르면 액티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옥타비아누스(훗날 어거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쫒아 결국 이들의 본거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무찌르게 되는데 이런 완전한 독자적인 집권체계의 시초를 다진 승리를 거둔 달이 8월이라 이 달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공화정시대의 달력엔 August에 해당하는 Sextilis가 29일밖에 안되는 걸 볼 수 있는데 현재 8월은 31일까지 있다. 이건 어거스투스가 바로 전달인 카이사르의 달이 31일이니 자신의 달도 이에 맞추기 위해 이틀을 더 넣어 31일로 맞췄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음.
September(9월): 고대 로마력으로 7번째 달
October(10월): 고대 로마력으로 8번째 달
November(11월): 고대 로마력으로 9번째 달
December(12월): 고대 로마력으로 10번째 달 > 위에 나왔듯 고대 로마력은 1년에 10개월만 있었는데 두개의 달을 뒤늦게 추가하다보니 두달간의 시차가 생김. 하지만 로마인들은 달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냥 사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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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지금쓰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율리우스력이 지금쓰는 달력이랑 똑같은데?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은 사실상 똑같은 역법체계야.
하지만 전술했듯 율리우스력은 128년마다 1일의 차이가 나서
1600년이 지난 중세시대엔 13-4일 이상의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157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400년에서 세번의 윤년을 없애는 단순한 방법으로
수나라부터 시작해서 당나라의 1~2차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고구려. 중원의 패자였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 그 여파로 무너지고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당나라 또한 1차 대규모 원정에서 대패를 하고 돌아갔으며 2차 원정 전에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대규모 상륙을 계획한다.
고구려의 동맹세력이나 우호세력을 모두 박살 낸 당나라였기에 자신감 뽕을 거하게 들이키고 대규모 원정을 떠났다.
고구려 동맹국들은 모두 박살 냈기에 당나라 vs 고구려 1:1 정면 승부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앞서 멸망한 백제와는 달랐다 일단 고구려는 백제보다 훨씬 강한 국가였고, 백제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기에 대비 또한 철저했었다.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당나라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어떻게 이긴지는 모르지만 당나라 소정방은 신라 김유신의 보급이 오기전까지 죽느냐 사느냐고 발만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2차 고구려 원정을 또 실패한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 침공 계획을 포기한다... 근데 당나라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연개소문(淵蓋蘇文) - 617~664
고구려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고당 전쟁이 끝난 2년 후 사망했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아들이 세 명이 있었는데, 장남인 연남생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고 세명에게 분할하여 생을 마감했다.
이게 고구려의 멸망의 시초였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들이 권력을 분할했지만 장남인 연남생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정확한 연도는 안 나와있지만 연남생은 최고 권력자가 되고 나서 고구려 여러 성들을 순방을 떠난다 이때 두 동생들에게 조정에 남아 자리를 지키게 했다.
근데 권력이 뭐라고 형 연남생이 떠나자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은 연남생의 부하를 죽이고 형의 아들이자 자신들의 조카인 연헌충까지 죽인다. 형 연남생을 다시 평양성에 돌아오라고 하며 죽일 계획을 갖는다.
자기 동생들이 자기를 죽일 거라고 눈치챈 연남생은 국내성에 남아 여러 성주들에게 자신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도움을 호소한다. 확실히 연남생은 국정 실책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연남생이 유리하나 싶었으나 동생들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못 주고 내전은 길어졌으며 보장왕은 평양성에 있었기에 연남건 연남산 두 형제들에게 전선이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아들까지 죽고 자신은 이제 두 동생들한테 몰릴 때로 몰린 연남생은 맛탱이가 갔는지 당 고종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치고받고 싸우던 당나라에게. 당나라도 맨 처음에 이게 뭔 개수작이지? 하고 믿지 않았으나 연남생의 다른 아들 연헌성이 직접 당나라에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니 당나라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군대를 조직하고 대규모 원정을 다시 감행한다.
국내성을 필두로 연남생의 세력들이 모두 당에게 투항하였고 내전으로 지친 고구려는 1~2차 고당 전쟁 때 보여준 모습은 온대 간 대 없고 당나라 군이
아우토반에서 질주하듯 만나는 고구려 군마다 격퇴하고, 엄청난 속도로 평양성으로 돌진해오고 있었으며
아래에서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문무왕과 대규모인 신라군이 북진하고 있었다.
고구려 남부 전선을 담당하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대규모로 북진하는 신라군을 보고 바로 항복했다. 평양성 이남 지역이 모두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북쪽 전선에서는 당나라 설인귀등 당나라 장수들이 만나는 고구려군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평양성 코앞까지 왔다.
결국 평양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포위됐으며 668년 가을 9월에 평양성이 함락됐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멸망했다.
중원의 패자인 수, 당의 연이은 대규모 공격에도 우주방어를 보여주며 막아내던 고구려가 형제들의 권력 다툼에 모래성 무너지듯이 와르르르 무너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