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마피아



1.세르비아 - 마피아


세르비아 마피아는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 10여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다.

마약 밀매, 밀수입, 청부살인, 도박, 정보절도 등 범죄유형도 폭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Vozdovac, Surcin, Zemun 등 3개 거대 조직이 그 아래 방계 조직을 제어하는 형태로,

세르비아 국내에 30-40개의 작은 조직이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마피아



2. 이스라엘 - 마피아


마약, 매춘 등을 주요활동으로 하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예전엔 이스라엘 마피아라고 하면 의리, 인정이 두터워 경외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자비하고 쉽게 사람을 죽여 공포감만 주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마피아는 미국 정부와 연결돼 있다는 설이 있다.



 

멕시코 카르텔
멕시코 카르텔



3. 멕시코 - 카르텔
 

멕시코 카르텔, 너무 유명해서 설명 생략.

온갖 화려한 무기들과 유탄발사기, 탱크에 잠수함까지 가지고 있는 군대 수준의 조직.

멕시코 남부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일본 야쿠자

 


4. 일본 - 야쿠자


야쿠자의 기원은 17세기라고 하는데, 현재 2,500개 조직에 11만명의 구성원이 있다고 한다.

주요활동은 ‘무수정 포르노 판매’와 매춘 알선, 불법이민 가이드, 갈취 등이다.

 

 

 



최근 젊은 애들 지원이없어서 50대 이상 조직원이 40%에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홍콩 삼합회



5. 홍콩 - 삼합회


홍콩을 거점으로 하는 범죄조직, 약 57개파로 이루어져있고, 마약 매춘 알선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콜롬비아 카르텔
콜롬비아 카르텔



6. 콜롬비아 - 마약 카르텔
 


주요 마약거래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으로 수많은 납치와 테러에 관여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1980년부터 1990년대에 힘을 가진 대규모 마약 카르텔이 퇴색하고 현재는 그 세를 늘려가고 있는 상황.

마약 카르텔과 정부군의 전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파블로와 엘 차포의 이름은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져있을 정도. 

 

 

러시아 마피아


 

7. 러시아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의 기원은 15세기에서 16세기 무렵에 나온 반정부 무장집단 또는 노예제 시대의 농노라고도 한다. 

심지어는 러시아 제국의 포로라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구소련 시대 사회주의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암시장에서 자유시장 경제가 펼쳐지면서 성장기반으로 작용했다. 

암시장 브로커에 손을 펼친 러시아 마피아의 주요활동은 소규모 조직일 경우 협박, 매춘 등을 주로 한다.

반대로 대규모 조직은 국영기업과 민간기업 인수, 마약거래, 돈세탁, 무기 밀매 등을 한다.

러시아 내부 보고에 따르면 마피아 관련 기업의 수는 5,600개 이상. 구성원 수는 10만명 이상이다.

게다가 러시아 GNP의 40%를 이런 범죄조직이 벌고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마피아



8. 이탈리아 마피아


‘대부’ , ‘스카페이스’ 두 개로 요약 가능, 이탈리아 3대 마피아의 연 매출은 애플에 육박하는 161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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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1인 독주 체제의 아성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전 SKT와 지상파 3사가 뭉친 토종 OTT 웨이브가 공식 출범해서 도전장을 내민 상황이고 
CJ ENM(CJ) 이나 JTBC (중앙)도 통합 OTT를 위해 손을 맞잡은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넷플릭스와 디즈니...등 다국적 OTT가 필사적으로 한국시장에 진출하려는 이유 


 

 


많이들 알겠지만 이제 기존 TV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미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코드커팅 현상이 가속화되고있는데,
코드커팅이란 단어 그대로 선을 끊는단 의미로
그동안 가정 내에 케이블TV나 위성TV 같은 유선방송을 이용했던 것에서
별도의 선이 필요 없는 온라인 기반 동영상 서비스로 이동해가는 시청 행태를 뜻하는 것으로서,


 

 



더이상 10대나 2049 세대에게 TV는 필수매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아마 이러한 흐름은 점차 50대나 60대로까지
확산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당장 한국만해도 5060세대들의 경우 뉴스 보도나 시사부문만 따지고보면 
이미 TV에서 유튜브로 갈아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뭐 2049세대는 넷플릭스에 10대나 5060세대들은 유튜브에 빠졌단 
보도나 각종 연구결과가 나오고있는데 일련의 급속한 변화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넷플릭스 권역별 점유율

 


이러한 흐름이 보편화된 상황에서 그동안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독주했던 
넷플릭스는 현재 큰 고민에 빠져있다. 그도 그런것이 더이상 넷플릭스 천하가 아니기 때문. 


 

 

아마존과 훌루
디즈니와 애플티비



북미지역의 경우 이미 기존 경쟁자인 아마존이나 훌루가 거세게 치고 올라오고 있고,
올 하반기 디즈니나 애플의 자체 OTT 서비스가 런칭됨에 따라 넷플릭스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다. 


 

 


 
거대 미디어 제국인 디즈니가 자체 OTT 인 디즈니+는 물론이고 
폭스를 인수함에 따라 훌루까지 완전 접수하면서, 
(지난 5월 2대 주주인 컴캐스트 지분까지 먹었고) 
훌루와 디즈니+ 쌍끌이 체제로 글로벌 시장에서 넷플릭스를 위협할 게 뻔한지라 
넷플릭스의 위기감은 더욱더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넷플릭스가 타깃으로 잡은 곳이 바로 아시아. 그 중에서 한일양국인데 
아니 중국이나 인도같은 인구대국들이 있는데 일본은 그렇다치더라도 
왜 한국을 공략하는거냐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넷플릭스 미서비스 지역
인도의 OTT 핫스타



일단 많이들 알겠지만 중국이나 인도는 넷플릭스에게 진입장벽이 높다. 
일단 중국은 서비스 자체가 불가한 상황이고 
(그리고 그 사이 자체 OTT가 장악했고) 
인도같은 경우는 핫스타란 OTT 기업이 압도적으로 독주하는 상황인데,
(시장 점유율이 70%에 달함 넷플릭스는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이고) 
참고로 핫스타는 원래 폭스 소유 기업으로 디즈니가 폭스를 인수함에 따라 현재 주인이 디즈니이다. 


 

 


디즈니 입장에서는 훌루나 디즈니+로 북미나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 여력이 있고 
핫스타로 인도시장을 꽉 잡고있는 상황이니 넷플릭스 등 경쟁자들에 비해 훨씬 유리한 상황이라 판단된다. 


 

TV조선 뉴스

 


그러다보니 넷플릭스 입장에선 아시아 시장에서 노려볼만한 시장이 한국과 일본시장인데 
넷플릭스는 한국과 일본 시장을 노리지만 동시에 한국의 드라마나 일본의 애니메이션같은 
해외에서 먹혀드는 킬러 컨텐츠를 이용해 향후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 등을 공략하고자 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을 쌍수들고 환영하는 이유도 
넷플릭스에 의해 한드도 한단계 진화할것이란 기대때문에 그런건데 이 부분은 지켜봐야하고 



넷플릭스의 한국가입자수
넷플릭스내 한국 컨텐츠



아무튼 그렇게 각고의 노력끝에 초반엔 다소 부진하긴 했지만 
2018년 이후 넷플릭스는 한국 시장 안착에 성공했으며 
현재 무서운 속도로 급성장하고 있다. 


 

 

MBC뉴스

 


올 하반기 런칭하는 디즈니+ 또한 조만간 한국시장 진출이 확실시되는데 
디즈니의 경우 넷플릭스 등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확실한 강점이 있다. 바로 마블.

 

 

넷플릭스

 


그러다보니 넷플릭스 입장에선 기껏 새로운 시장 개척해서 들어왔더니 
디즈니가 또 따라 들어오니까 게다가 마블이란 한국에서 무조건 먹히는 
컨텐츠를 들고 오니 초조할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에게 마블이란 컨텐츠가 있다면 넷플릭스에겐 유료방송 (케이블 유선방송나 IPTV) 
시장 점유율 2위에 빛나는 LG란 강력한 파트너가 있다. 
넷플릭스가 초반 부진을 딛고 한국시장 안착에 성공한 이유중 하나가 바로 LG 유플러스와 제휴때문이였기도 하고.


 

 

SBS 뉴스

 


그러다보니 지상파들의 연합체인 한국방송협회에선 넷플릭스와 LG 유플러스의 제휴를 
부당하다 외국 기업과 결탁해 국내 미디어 생태계를 파괴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에 대해 그동안 기득권으로 꿀빨던 지상파가 케이블과 종편에 
이어 넷플릭스까지 치고 들어오니 괜히 발작하는거 아니냐는 비판적 의견이 많은 편이다.  

 

 

넷플릭스와 LG U+



이들의 동맹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강력하게 일치해서 맺어지게 되는데, 
넷플릭스는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비빌 든든한 언덕이 필요했고 
LG 유플러스 입장에선 그동안 이동통신이나 방송분야에서 SKT나 KT에 눌려 지내다 
그들을 제낄만한 강력한 컨텐츠가 필요했다.
그래서 현재까지 둘의 동맹은 성공적이란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러다보니 LG입장에서 더욱더 넷플릭스에 매달리는 부분이 적지않은 것도 사실이다. 


 

 



현재 LG 유플러스는 하현회 부회장의 주도로 상당히 공격적인 전략으로 임하고 있는데 
넷플릭스에 이어 구글 (유튜브)는 물론 미국의 버라이즌, 영국의 보다폰 등과도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튼 그래서 툭하면 LG에서 넷플릭스나 유튜브 관련 
요금제나 이벤트를 쏟아내는 것도 이러한 동맹관계 때문에 그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보니 SKT나 KT의 위기감은 커지고 있다.
특히나 SKT의 경우 LG가 넷플릭스나 유튜브와 손잡고 
공격적인 확장전략으로 나오는걸 크게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KBS 뉴스

 


그래서 SKT가 선택한 동맹은 바로 지상파 3사 (KBS MBC SBS)다. 

 

 


# 넷플릭스와 디즈니+ 에 맞서는 SKT + 지상파 연합군 토종 OTT 웨이브 

 

 



그렇게 런칭한게 바로 웨이브이다.
SKT가 900억을 투자해 30% 지분을 확보해 1대 주주로 등극하고 
그 다음 지상파 3사가 각자 23.3% 지분을 가지고 참여하게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SKT나 지상파 3사가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다는 점. 
위에서 말했지만 SKT 입장에선 LG가 외국기업 (넷플릭스나 유튜브)와 손잡고 
거세게 몰아부치는게 상당히 위협적인지라 이에 대한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였고 
특히나 과거 수십년간 우물안 개구리로 기득권을 누리며 제대로 꿀빨았던 지상파 3사의 경우는 
가뜩이나 CJ ENM이나 종편에 치여 하락세 탄것만 해도 서러워 죽겠는데 외국 것들까지 설쳐대니 
SKT보다 더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다보니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결국 손을 맞잡게 된건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것은,



 

 


지상파란 지난 수십년 대한민국 미디어를 좌지우지했던 거대한 기득권이 무너졌으며 
본격적인 미디어 전쟁이 펼쳐졌다는걸 의미한다. 
뭐 사실 CJ ENM 이나 종편이 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해서 사실상 확인사살을 당한 셈. 
수십년간 서로 으르렁대던 3사가 생존하고자하는 몸부림에서 다급하게 손을 잡은 일대 사건. 


 

 

넷플릭스와 웨이브 비교표



웨이브의 경우
유료 가입자 기준으로 120만명으로 1위 넷플릭스 (184만명) 에 이어 2위. 
그리고 다른 비교는 위 표를 참고하면 된다.


 

 

 


그리고 2023년 말까지 기준으로 유료 가입자 500만명과 연 매출 5000억원을 
목표로 정하며 야심차게 출발했는데 물론 이에 대해선 긍정론과 회의론이 엇갈리고 있다.


 

 

웨이브 요금제
OTT 요금제 비교
넷플릭스의 킹덤과 TVN 미스터 선샤인

 


그동안 지겹게 강조했지만 넷플릭스는 한국시장을 진출하면서 
한국 드라마를 킬러 컨텐츠로 선정하고 거기에 사활을 걸고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201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드라마 많은 투자를 제대로 한 대작들은
대부분 넷플릭스 투자를 받았다. 이는 글로벌 방영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수십억에서 수백억씩 투자를 받아 제작하는데,
오죽하면 넷플릭스와 방영권 계약을 못맺으면 제작비를 충당못해 드라마가 엎어질 정도이다.
그건 지상파도 마찬가지로, 현재 방영되거나 방영예정인 지상파 대작들도 넷플릭스 자본이 투자된다. 
아이러니하게 넷플릭스에 대항하려 뭉쳤는데 넷플릭스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SBS 배가본드


 
그걸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있는데, 최근 막 방영을 시작한 이승기, 수지 주연의 
SBS 금토드라마 배가본드의 경우 제작비가 250억이나 투입됐고, 절반정도를 넷플릭스가 투자하였다. 


 

 



그리고 원래 5월 방영예정이였으나, 하지만 넷플릭스 측에서 자기네 스케줄이 있다고 
9월로 미루자며 일방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심지어 제작투자금도 그때 준다고 통보했다는데 이는 넷플릭스에서 힘을 과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BS는 눈물을 머금고 수용하고 결국 넷플릭스 스케줄 맞춰서 방영하게 되는데
그만큼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러한 최근의 사례를 보면서 지상파는 더욱더 자체 OTT인 웨이브를 키울 결심을 하게 된다. 
이대로 가다간 넷플릭스에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이리저리 휘둘릴 수 있기 때문. 

 

 

KBS 조선로코 녹두전 



그래서 웨이브도 아시아판 넷플릭스를 천명하며 드라마 투자에 박차를 가하는데 
그 첫 타자가 오는 30일 방영예정인 KBS 월화드라마 조선로코 녹두전이다.
여기에 무려 100억을 투자하게 되는데,


 

 

배우 김소현, 장동윤



이 작품의 경우 배우 장동윤, 김소현을 주연으로 내세운  
전형적인 여성 시청자를 타겟으로 한 퓨전사극이라 볼 수 있는데 성공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고 있다. 

 


# 이들에 맞서 CJ와 중앙이 힘을 합친 또다른 토종 OTT 

 

 

JTBC뉴스



사실 어쩌면 넷플릭스나 디즈니+ 입장에선 웨이브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등장하게되는데 
바로 CJ그룹과 중앙그룹이 뭉친 통합 OTT 이다. 


 

 



CJ 자체 OTT이 티빙을 기반으로 한 통합 OTT 플랫폼의 경우
CJ ENM이 1대 주주, JTBC가 2대 주주로 참여하기로 결정됐다고 알려졌다. 



 

 


CJ와 중앙그룹의 합작 OTT의 경우 벌써부터 범 삼성가의 결합이란 점에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업계는 물론이고 증권가에서도 온갖 썰들이 난무하는 상황. 
또다른 범 삼성가도 여기에 투자하느니 뭐니 말들이 많은데 어떻게 전선이 펼쳐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상황. 
(LG는 넷플릭스랑 손잡고 SKT는 지상파랑 손잡고 남은건 KT인데 그러다보니 KT랑 손잡는거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돌고 있음) 



 



그래서 넷플릭스 입장에서도 웨이브보단 이쪽 연합을 더 예의주시 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예기치않게 유탄을 맞은 곳이 요즘 한창 기세를 올리는 TV조선이다.
내부에선 이제 겨우 시청률 경쟁에서 한숨 돌리나 했는데 이번엔 OTT 전쟁이냐,

어떻게 하냐 난감한 기류가 강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뭐 이러한 OTT 전쟁이 일반 대중인 소비자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고인물이였던 한국 미디어 시장이 본격적으로 치열한 경쟁구도로 변모하는거니까

지상파 기득권 무너져서 좋고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꿀빨던 한국 미디어 기업들에게 강력한 자극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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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1944년의 중국 대륙,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앞두고 장제스는 눈물을 훔치며 대만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장제스는 자신을 도와주던 미국에게 큰 군함을 몇 척 빌려달라고 하였다.

미국은 당연히 피난민들을 태우겠거니 하고 군함을 빌려주었지만,

 

 

 

 

 

군함에는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은 유물만 잔뜩 실었고 그 수가 60만 8천 점에 달했다.

피난민은 뒷전이고 문화재부터 먼저 챙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중국 대륙에서는 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전근대 역사에서 모든 왕조들은 정통 계승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 전의 왕조가 소장하고 있던 황실의 보물을 훼손하지 않고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황실이 소장한 보물은 단순히 금은보화라는 차원을 넘어

임금과 그 왕조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상징성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장제스는 피난민 대신에 문화재를 선택한 것이다.

남은 피난민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해보면 비판받을 소지가 있겠으나,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있는 홍위병들

 

 

1966년 붉은 책을 든 무리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것은 10년 간의 동란 문화대혁명을 알리는 서막이였다.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가서 한 일들을 주욱 살펴보면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문화대파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홍위병들이 박살낸 문화재의 목록 中 일부

  •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한 삼성상(三聖像) 중의 하나일 팔세등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扁平)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孔令貽)의 분묘도 파헤쳐짐.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文革)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 곽거병의 곽릉(霍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세 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 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 서성(書聖) 왕희지의 능묘와 20무(畝)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건 서성(書聖)의 망혼(亡魂)이 떠난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뿐.

  • 문성공주(文成公主, 당대의 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건포(松贊乾布)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됨.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없애버림.

  •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악비의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 해남도의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때 해서의 묘가 부서짐, 청백리의 유골도 파헤쳐짐.

  • 호북강릉(湖北江陵)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 북경성 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 또한 베어버림.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인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세 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한 권뿐이었는데 네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들이 교사의 선동 하에,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친 후, 모여서 비판하고 태워 재로 만듦.

  • 북경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 강유위(康有爲, 변법자강운동을 양계초와 함께 주도함)의 묘도 파헤쳐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靑島)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함.

  •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 양후청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도 파괴됨.

  •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왕(宋王) 안석(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두 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백 여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됨.

  • 천년 넘게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베이징 성곽을 3년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현재 그 성곽 터에는 3환로가 깔리고 그 밑에는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지어졌다.

  • 송대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근 일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이것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물론 이 정신나간 동란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유적들도 있긴 있다.

 

 

 

자금성
포탈라궁
막고굴

 

 

자금성, 포탈라궁, 막고굴도 역시 홍위병들에 의해서 재가 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경비병을 보내서 엄호한 덕에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힘을 닿는대로 문화재를 지켜보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파괴된 것은 문화재 뿐만이 아니였다. 중국의 전통 연극인 경극과 전통 음악,

전통 무술 등의 무형 문화재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에 필요한 가면과 의상, 대본은 불태워졌으며 무대는 사라졌다.

전통 악기의 울림 대신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나팔의 합창이 대륙을 뒤덮었다.

소림사에서 전해져 내려온 쿵푸도 소실되었다.

 

 

 

지식인이나 예술인, 과학자 등은 홍위병들에 의해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황실 만찬에 등장하는 요리비법을 전한 만한전석과 요리사들도 한순간에

증발했는데 훗날 만한전석을 복원하려고 청 대의 환관을 불러서 물었지만

하도 나이가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지라 최면요법을 동원하기까지 했댄다.

 

 

 

 

 

결국에는 중국보다도 이웃나라인 한국이나 일본이 중화 문명을 더 잘 보존한 형국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법도 잃어버려서 한국의 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고

중국 역사에서 빛나는 시대인 당나라의 스타일도 오히려 일본이 더 잘 계승하고 있을 지경.

실제 중국에 대한 콘텐츠도 중국 본토보다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입지않은

지역에서 쏟아져나오는 실정으로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완전히 작살내놓은 것이다.

 

 

 

 

 

오늘날 중국인이 미개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전통적인 미풍양속들은 봉건 잔재 취급을 받았고,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는 행위가 장려되었으며 교육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성적인 논리보다

프로파간다와 우격다짐, 억지생떼, 진영논리, 그야말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 된 것.

 

지식인과 예술인을 천대하는 시대를 겪었으니 지성과 교양에 대해서 콧웃음을 치고

질서가 붕괴된 시대를 겪었으니 에티켓과 절차를 모르고, 목소리 크면 이기는 시대를 겪으니 언성이 시끄럽게 되며

소련은 수정주의, 미국은 제국주의로 적대시하는 시대를 겪었으니 국수주의에 매몰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장제스가 털어서 가지고 온 유물들은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 중이다.

만약에 유물을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로 문화대혁명 때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대륙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이러쿵 저러쿵 군소리를 못하고 있는 실정.

저우언라이와 장제스가 아니였다면 문화대혁명 때 남아나는 게 없다시피 파괴되었을 것이고

물론 장제스도 문화대혁명이 터질 거라는 건 몰랐겠으나 결과적으로 유물을 챙겨 남하한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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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달력

 


매일같이 사용해서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삶에 녹아있는 당연한존재인 달력. 왜 지금과 같이 정해졌을까?

아마 학교에서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이라고 들어는 봤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것은 그레고리력이지만 이 모든 기본은 로마제국의 줄리우스 시저가 제정한 율리우스력에서 왔다.

 

 

고대 로마공화정 초창기엔 고대 이집트의 역법시스템을 보완한 태음력을 사용했는데 십진법을 좋아했던 로마인들은

1년에 달을 10개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10월이 끝난 후 50여일을 달 없이 보낸 후 다시 1월을 맞이하는 구조여서

언제부턴가 2개의 달을 추가, 다음과 같은 구조의 12개월을 가지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Month Length (days)

Martius 31

Aprilis 29

Maius 31

Iunimus 29

Quintilis 31

Sextilis 29

September 29

October 31

November 29

December 29

Ianuarius 29

Februarius 28

Februaris (Leap year) 23

Intercalaris(Leap year) 27/28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중간의 Quintilis와 Sexilis만 제외하고 지금 쓰이는 달의 영어식 표현들과 같거나 비슷해보인다.

고대로마의 라틴어식 표현이 현재영어에도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

이 고대 로마공화정 역법에 따르면 윤년(Leap year)는 2년에 한번씩 돌아왔고

따라서 다음과 같은 4년 주기의 반복이었다.

355일 -> 377일 -> 355일  -> 378일 

 


태양의 사이클과 달의 사이클을 맞추려고 노력한건데 복잡하기도 하고,

한해의 길이가 매년 크게차이나는 단점이 있었고,

근본적으로 달과 태양의 움직임이 전혀 달라 이 둘을 맞추려는 노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로마 공화력의 실제 모습 (BCE 60)

 

 

그래서 보다못한 시저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천문학자인 소시게네스(Sosigenes)에게 부탁해

달을 포기하고 태양의 움직임에만 신경쓴 태양력을 만들게 된다.

그 바뀐 태양력이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과 동일하다.

4년마다 한번씩 윤년이 있어서 2월이 28일에서 29일로 바뀌게 되는 것.

그렇게 되면 평균적으로 1년이 365.25일이 되는데

이는 실제 천문학적 회귀년인 365.2422일보다 0.0078일(11분 14초)이 길게되어 128년에 한번씩 1일의 편차가 나게 되어있어.

 

 

 

우리에게 현재 달력을 선사한 줄리우스 시저 Turin Archaeological Museum, Italy

 

 

지금 쓰는 달의 영어 명칭은 로마공화력에서 쓰던 명칭과 대략 비슷한데 몇개 달라진게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

 

January (1월): 두얼굴의 신으로 유명한 로마 시작의 신 (god of beginning) Janus의 달

February (2월): 로마시대 2월 중순에 열렸던 정제의 축제 (feast of purification) Februa의 달

March (3월):  로마 전쟁의 신 Mars의 달

April(4월):  그리스 미의 여신 Aphrodite의 달

May(5월): 그리스 봄의 여신 Maia의 달

June(6월): 로마 신들의 여왕 Juno의 달

July(7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 반란세력에게 암살당한 BCE 44년 로마 상원의원들이 카이사르를 기리기위해 원래 5번째 달이란 뜻의 Quintilis를 개명, Julius 의 달로 지정

August(8월): 로마 초대황제 Augustus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원래  6번째 달인 Sextilis를 자신의 달로 만듬. 왜 8월로 정해졌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진 않은 가운데 여러 설이 있다. 그중 유력한 하나로 로마시대 역사가인 Macrobius에 따르면 액티움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옥타비아누스(훗날 어거스투스)와 아그리파는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쫒아 결국 이들의 본거지였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무찌르게 되는데 이런 완전한  독자적인 집권체계의 시초를 다진 승리를 거둔 달이 8월이라 이 달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공화정시대의 달력엔 August에 해당하는 Sextilis가 29일밖에 안되는 걸 볼 수 있는데 현재 8월은 31일까지 있다. 이건 어거스투스가 바로 전달인 카이사르의 달이 31일이니 자신의 달도 이에 맞추기 위해 이틀을 더 넣어 31일로 맞췄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음.

September(9월): 고대 로마력으로 7번째 달

October(10월): 고대 로마력으로 8번째 달

November(11월): 고대 로마력으로 9번째 달

December(12월): 고대 로마력으로 10번째 달 > 위에 나왔듯 고대 로마력은 1년에 10개월만 있었는데 두개의 달을 뒤늦게 추가하다보니 두달간의 시차가 생김.  하지만 로마인들은 달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냥 사용함.

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데 지금쓰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율리우스력이 지금쓰는 달력이랑 똑같은데?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은 사실상 똑같은 역법체계야.

하지만 전술했듯 율리우스력은 128년마다 1일의 차이가 나서

1600년이 지난 중세시대엔 13-4일 이상의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157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400년에서 세번의 윤년을 없애는 단순한 방법으로

천문학의 회귀년 365.2422일과 근접한 365.2425일(회귀년과 0.0003일, 26초의 차이가남, 3300년마다 1일의 편차)이

1년인 그레고리력이 탄생한 것.

 

 

여담으로 각각의 유럽국가들이 정치적/종교적 이유로 그레고리력 채택을 다 다른 시점에 하게된다.

로만카톨릭을 따르는 국가들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바로 채택했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들은

1900년대까지도 율리우스력을 사용하다 뒤늦게 추세를 따라 그레고리력을 선택하게 된다.(아래 표 참조)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이 기간에 유럽의 사건들이 어떤 역법에 따라 날짜가 기록되었는지 규명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지.

 

 

나라/지방에 따라 그레고리력을 채택한 연도

_________________________

1582: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폴란드

1610: 프러시아

1700: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1753: 영국 (그리고 전세계 영국 식민지들)

1873: 일본

1896: 한국 (을미개혁 후 김홍집 내각이 결정. 음력 1895년 11월 17일이 양력 1896년 1월1일이 됨 )

1912: 중국, 알바니아

1916: 불가리아

1918: 러시아, 에스토니아

1919: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1923: 그리스

1926: 터키

_________________________

 

 

 

근데  영어로 달력인 Calendar 는 어디서 온 말일까?

로마시대엔 매달의 첫째날을  Kalendae 라고 불렀고 모든 빚은 이날 갚도록 되어있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의 빚을 기록하는 장부책 이름을 Calendarium 이라고 부르기 시작해

이 말이  현대영어 Calendar 의 기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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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상황

 


수나라부터 시작해서 당나라의 1~2차 대규모 침공을 막아낸 고구려.
중원의 패자였던 수나라는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다 그 여파로 무너지고

당대 최강이라 불리던 당나라 또한 1차 대규모 원정에서 대패를 하고 돌아갔으며
2차 원정 전에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기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대규모 상륙을 계획한다.

고구려의 동맹세력이나 우호세력을 모두 박살 낸 당나라였기에 자신감 뽕을 거하게 들이키고 대규모 원정을 떠났다. 

고구려 동맹국들은 모두 박살 냈기에 당나라 vs 고구려 1:1 정면 승부였다.
하지만 고구려는 앞서 멸망한 백제와는 달랐다 일단 고구려는 백제보다 훨씬 강한 국가였고,
백제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다 지켜보고 있었기에 대비 또한 철저했었다.

결과는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당나라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어떻게 이긴지는 모르지만
당나라 소정방은 신라 김유신의 보급이 오기전까지 죽느냐 사느냐고 발만 동동 굴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2차 고구려 원정을 또 실패한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 침공 계획을 포기한다...
근데 당나라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연개소문(淵蓋蘇文) - 617~664

 


고구려 최고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이 고당 전쟁이 끝난 2년 후 사망했다.
연개소문에게는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아들이 세 명이 있었는데,
장남인 연남생에게 권력을 몰아주지 않고 세명에게 분할하여 생을 마감했다.

 


이게 고구려의 멸망의 시초였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들이 권력을 분할했지만 장남인 연남생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정확한 연도는 안 나와있지만 연남생은 최고 권력자가 되고 나서
고구려 여러 성들을 순방을 떠난다 이때 두 동생들에게 조정에 남아 자리를 지키게 했다.

근데 권력이 뭐라고 형 연남생이 떠나자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은 연남생의 부하를 죽이고
형의 아들이자 자신들의 조카인 연헌충까지 죽인다.
형 연남생을 다시 평양성에 돌아오라고 하며 죽일 계획을 갖는다.

자기 동생들이 자기를 죽일 거라고 눈치챈 연남생은 국내성에 남아 여러 성주들에게
자신의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도움을 호소한다.
확실히 연남생은 국정 실책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연남생이 유리하나 싶었으나
동생들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못 주고 내전은 길어졌으며 보장왕은 평양성에 있었기에 
연남건 연남산 두 형제들에게 전선이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아들까지 죽고 자신은 이제 두 동생들한테 몰릴 때로 몰린 연남생은 맛탱이가 갔는지
당 고종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치고받고 싸우던 당나라에게.
당나라도 맨 처음에 이게 뭔 개수작이지? 하고 믿지 않았으나
연남생의 다른 아들 연헌성이 직접 당나라에 가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니
당나라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군대를 조직하고 대규모 원정을 다시 감행한다.

 

 

 

 


국내성을 필두로 연남생의 세력들이 모두 당에게 투항하였고 내전으로 지친 고구려는
1~2차 고당 전쟁 때 보여준 모습은 온대 간 대 없고 당나라 군이

아우토반에서 질주하듯 만나는 고구려 군마다 격퇴하고,
엄청난 속도로 평양성으로 돌진해오고 있었으며

아래에서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문무왕과 대규모인 신라군이 북진하고 있었다.

 


고구려 남부 전선을 담당하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대규모로 북진하는 신라군을 보고 바로 항복했다.
평양성 이남 지역이 모두 신라에 투항한 것이다.

북쪽 전선에서는 당나라 설인귀등 당나라 장수들이 만나는 고구려군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평양성 코앞까지 왔다. 

결국 평양성은 나당 연합군에게 포위됐으며 668년 가을 9월에 평양성이 함락됐다.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고구려가 멸망했다.

 


중원의 패자인 수, 당의 연이은 대규모 공격에도 우주방어를 보여주며 막아내던 고구려가
형제들의 권력 다툼에 모래성 무너지듯이 와르르르 무너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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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선조 9년 6월 26일, 선조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조를 시켜서 공사로 삼아라." 

 

 

 

 

 

결국 현상금을 걸어 신고하고 체포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당시 사람의 고기간담창질(피부에 나는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치료하는 특효약이라고 해서 비싼 값으로 팔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힘없는 아이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하는 것은 물론, 

어른이라고 해도 혼자서 길을 걷노라면 잡혀서 배가 갈리고 쓸개가 빼내어졌다. 

이런 일이 거듭되다 보니, 인적이 드문 산의 골짜기에는 나무에 묶인 채 배가 갈려 죽은 사람들이 줄줄이 널려 있어, 

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섰는데 나무마다 배가 갈린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면,

어느 나무꾼이 그걸 보고 싶어 산에 들어갔을까. 

행여나 그런 무도한 일당들과 마주친다면 이번에 배가 갈리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나라에서 직접 나서서 사람 배를 갈라 간과 쓸개를 빼어가는 이들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던 것이다. 

아직 임진왜란이 시작되지도 않은, 굳이 말하자면 아직까지는 평화로운 조선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사서에는 창질, 나질(나병균에 의하여 감염되는 만성 전염병)

등으로 기록된 질병은 문둥병,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도 한다. 

나병은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신체 일부가 없어지는 끔찍한 증세 때문에 인간의 역사상 혐오의 대상으로 다뤄졌다.

이스라엘의 성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진시황 시대의 법률문서에서도 나환자들을 격리시키는 규정이 나와 있을 정도로 오래된 질병이다. 

 

 

 

한국에서도 소록도가 생기기 전까지, 

나환자들은 이리저리 떠돌면서 걸식하고, 온갖 악평을 들으면서 감금되었고,

돌팔매질도 당했으며 때로 죽임까지 당하는 가혹한 대우를 받아왔다. 

현대의학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나병은 전염이 되지 안되는 병이고 도중에 치유되어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는 물론 아직까지도 이런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 대신 오래전 속설에서는, 어린아이의 간이 나병의 특효약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 

 

당연히 나환자들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고, 그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었다는 소문은 심심치 않게 전하고 있다. 

명종 19년에는 상주(尙州)에서 정은춘(鄭銀春)이라는 사람이 같은 동네의 일고여덟 살 먹은 아이를 꾀어 

산에 들어가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 살을 구워먹은 일이 벌어졌다. 

기록에는 병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정은춘은 아마 나병이나 기타 난치병 환자였을 것이다. 

명종은 이 사건에 크게 놀라 자세히 취조하도록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사람을 약으로 쓰는 방법이 완전히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유행했다. 

 

 

 

 

 

명종 21년에는 좀 더 참혹한 현실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서울에는 사람을 죽여서 쓸개를 빼내어 가는 일이 많이 있었고,

이로써 처벌을 받은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방종한(제멋대로 행동) 생활 덕에 창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떤 의관이 사람의 쓸개로 치료하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자 사람을 죽여 배 가르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도성 내의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종루(鍾樓) 근처에는 걸인(거지)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종루는 지금의 종로이고, 나머지 장소들은 모두 걸인이나 부랑자, 병자들에게 먹을 것과 약을 나눠주는 구제기관이었다. 

하지만 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이들 걸인들을 하나 둘 잡아가 쓸개를 빼내 죽였고, 

불과 4~5년 만에 길거리에는 걸인들이 한 명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걸인들은 아무 기댈 곳 없어 이런 곳에 찾아온 이들이었으니 하나나 둘쯤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걸인이 모두 사라지자, 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손을 뻗치게 되어 당시 사람들 중에서 아이를 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어째서 간을 빼내어 갔을까?

 

 

 

이는 장기 중에서도 간, 그리고 정확히는 쓸개가 가장 약효가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웅담(곰의 쓸개)을 보면 알 수 있듯, 동물의 쓸개는 가장 귀중한 약재 중 하나였다.

조선팔도 곳곳의 특산물을 기재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곰은 물론이요, 소, 돼지, 잉어, 담비, 고슴도치의 쓸개들이 주요 특산물로 많이 기재되어 있다.

동물의 쓸개도 좋은 약일진대, 사람은 어떠할까. 그런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닐까.

 

세조 시대 때는 신숙주가 함길도에서 올린 장계에는 사람 쓸개를 약으로 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변경의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을 피해 도망쳐온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여진족 중 화살 맞은 사람이 많자 중국인들의 쓸개를 빼내 독을 치료하려고 하여 도망쳤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장기가 꼭 나병뿐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약재로도 쓰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사람 쓸개를 빼내어 중국에 팔아 돈을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꽤나 오래된 소문인 것 같다.

 

 

 

선조 시대 때에는 이런 소문이 너무도 크게 번졌다.

 

 

평소라면 그냥 말썽을 피우고 지나치게 노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했을 법한 이야기가, 

이제는 도성 안을 떨게 만들고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왕이 직접 사람 간을 빼어가는 범인을 잡아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정도가 더 심각했던 것은 선조 40년 5월이었다.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간담을 빼어간다는 소문이 번졌고,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혼자서 다니지 못하고 무리를 지으며 다녀야 했다.

게다가 이런 소문은 전국적으로 번져서 아녀자들은 물론 선비들까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숨어 다녔다.

사람들은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농부들은 농사를 그만두었다.

한마디로 온 백성들이 온통 두려움에 떨었다.

 

과연 사람의 간담이 약효가 있었는지, 그것을 빼가는 조직이 있었는지 분명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살인자들을 잡으면 큰 상을 주겠다는 방을 걸었다.

심지어 사간원에서는 사람을 죽여 간을 빼내어 가는 범인들을 열심히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좌, 우 포도대장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기도 했다.

포도대장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 하겠지만,

사안은 위중한데 쉽게 해결되지 않으니 사람들의 불안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책임을 물은 것이다.

 

 

 

 

 

런데 왜 하필이면 선조 시대 때에 이 같은 식인의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겁에 질려 사회가 불안해지기까지 했을까.

 

 

사람을 죽여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평화로울 때나 어려울 때나 심심찮게 존재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를 뒤흔들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평범한 사실은 아니다.

 

 

여기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

사람의 쓸개를 빼어가는 소문은 반드시 가뭄,

그것도 전국이 타 들어갈 만큼 심각한 가뭄과 맞물려서 벌어진다는 사실이다.

 

소문이 돌았던 선조 10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법석을 벌였고, 

같은 소문이 돌았던 선조 40년에는 훨씬 더 정도가 심해서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4월부터 날씨가 가물었지만, 나라는 느직느직 준비를 해서 5월 초에야 겨우 기우제를 치렀다.

 

기우제를 벌인다고 해서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가 기우제라도 벌이는 것과,

그저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어차피 하늘이란 현대 과학의 힘으로도 정확한 일기예보를 할 수 없을 만큼 제멋대로이다.

하지만 불행한 일이 거듭되고 조금도 나아질 기색이 없는데,

아무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게 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이 벌어지기도 했다.

옛날에는 너무나도 미운 대상을 두고, 살점과 간담을 씹고 싶다는 표현을 썼다.

장군들은 물론이거니와 선비들도 적군이나 혹은 정적들을 이야기할 때 쓰는, 일종의 관용어구였다.

그런데 이게 속담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성종 시대 회령진의 장수 신수무(辛秀武), 정산로(鄭山老) 등은

항복한 여진족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와 그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낸 일이 벌어졌다.

이거을가개와 매번 대치하고 있었던 변경의 장수들로서는 많은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낸 엽기적인 행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동시대의 장수 소기파(蘇起坡)의 경우도 있다.

그는 여진족과 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지만, 

중종 때 왜군이 조선을 공격해 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치고, 

적병을 죽인 뒤 쓸개를 빼먹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태연하게 술을 마셔 '소야차(蘇夜叉)'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때의 '소'는 그의 성에서 따온 말이다.

불교에서는 악귀를 잡아먹는 무서운 귀신을 야차라고 하니,

왜군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사람들마저 소기파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철천지 원수를 두고 간을 내어먹고 뼈를 갈아 마시고 싶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마도 앞에서 든 예들은 그런 행동들이 그저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정말 실행해버린 경우일 것이다.

변경에서 하루하루 여진족과 싸워왔던 장수들은 전우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했을 것이고, 

그 사무치는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불태웠을 것이다.

동료의식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전쟁터에서 벗어나 있던 도성의 관리들이 보기에, 이들의 식인 행위는 커다란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

 

조선과 여진족의 관계라면, 세종 시기의 4군 6진의 개척 외에 별다르게 기억된 것이 없어 막연히 우리나라의 영토였겠거니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그 지역의 병사들은 수백 년에 걸쳐 여진족과 싸워왔으며 다치고 때로 죽어갔다.

사람의 배를 가르고 쓸개를 먹는 것은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일부러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여 소문을 내고, 이로써 적군에게 겁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적군이 겁에 질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쪽은 한결 싸우기 편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료만을 보고 조선의 군대 내에서 식인의 풍습이 일반적이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아기들, 그것도 신생아들은 웃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그동안 이러한 아기의 미소, 웃음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왔다.

그 결과, 미소는 단순한 미소 자체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감정을 유발하는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신생아)는, 외부의 자극에 상관없이 미소를 지을때가 많다.

이것을 자발적 미소라고 하는데, 이러한 자발적 미소는 아기가 잠잘 때 자주 보인다.





 

그 후, 생후 2개월이 되면, 시각과 청각, 촉각 등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외발적 미소를 짓기 시작한다.





 

아기의 부모님은 이 미소를 보고 기뻐하고,

또 웃는 아기에게 부모님도 웃어주거나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행동을 하면서

상호작용은 점점 늘어간다.




 

Fantz 라는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아기는 다른 어떤 자극보다 사람의 얼굴을 선호한다고 한다.

즉,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한 달 정도(생후 3개월)가 지나면, 부모님 등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미소를 짓는다.

이것을 사회적 미소라고 한다.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미소짓는 것이,

다른 사람의 미소나 자신에게 말 걸어주는 것과 같은 응답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알게 되고,

친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친한사람뿐만 아니라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미소를 잘 지어주는데,





 

생후 5개월이 넘어가면, 사회적 미소의 상대를 가리기 시작해서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게 된다.

친한 사람들에게는 미소의 회수가 많아지고 더 많이 웃거나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행동의 횟수가 줄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후 7~8개월이 되면 모르는 사람에게는 미소를 짓지 않고 고개를 돌리거나 울게 된다.

이렇게 생후 8개월 때 사람의 낯을 가리는 것을 8개월 불안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럼 왜 생후 6개월을 경계로 아기는 이러한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 아기는 태어나면서 원시적 반사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원시반사의 예로 파악반사가 있다.

파악반사는 아기의 손바닥에 연필이나 손가락 같은 것을 두면 꽉 쥐는 것을 말해.



 


 

이러한 원시반사는 생후 6개월이 되면 없어지고, 새로운 행동을 익힌다.

또, 이 시기에 대뇌피질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아기는 표상(이미지)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이 '어떠한 것이다'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기억속에 저장하는 것이지.


 


 

이렇게 표상을 생성할 수 있는 덕분에, 친한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자주 보는 사람은 이 사람은 '자주 보는사람(친한사람)'이라는 표상을 만들고,

모르는 사람은 '생판 처음보는 사람' 이라는 표상을 만들어서 서로 구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를 경계로 아기는 낯을 가리게 된다.




 

선천적으로 '미소' 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태어나기에

우리 아기들이 더 귀여운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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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빅파이

 

 

 


 

빅파이는 ‘Big pie’가 아니라 ‘Vic(Victory의 줄임말) pie’다.

 

 

 

2. 미란다

 

 

 

 

 

이 오래된 음료의 이름은 미’란’다가 아니라 미’린’다이다.

이름인 '미린다'(Mirinda)는 에스페란토어로 '굉장하다'(wonderful)이라는 뜻이다.

 

'미란다 원칙' 이랑 비슷해서 헷갈려한다

 

미란다 원칙( - 原則, 영어: Miranda warning,Miranda rights, Miranda rule)이란

수사기관이 범죄용의자를 체포할 때 체포 이유와 변호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

진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음을 미리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3. 오징어칩

 

 

 


 

이 과자의 이름은 오징어’칩’이 아니라 오징어’집’이다.

 

 

 

4. 히틀러는 독일인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다.

(1932년 공식적으로 독일인으로 귀화를 했을 뿐 태생자체는 오스트리안)

 

 

 

5. 프리 마돈나

 

 

 


 

오페라의 주역 여가수를 뜻하는 프리마돈나는 ‘프리 마돈나(Pri madonna)’가 아니라 ‘프리마 돈나(Prima donna)’이다.

프리마(prima)는 으뜸, 첫째라는 의미이고 돈나(donna)는 여성, 숙녀라는 의미다.

 

 

 

6. 스위트룸

 

 

 


 

스위트룸은 ‘Sweet room(달콤한 방)’이 아니라 ‘Suite room(갖춰진 방)’이다.

모든 시설(욕실,거실 등이 딸린)이 완비된 객실을 뜻한다. SUITE는 ‘한 벌’, ‘갖춰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7.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라 ‘다 빈치(Da Vinci)’, 다 빈치는 성이 아니라 ‘빈치(Vinci)’ 출신이라는 뜻이다.

 

 

 

8. '호랑이' 는 순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이고  '범' 이 순 우리말이다.

 

 

 


 

'호랑(虎狼)'

 

 

 

9. 카톨릭X    가톨릭O

 

 

 


 

천주교(Catholic)는 ‘카톨릭’이 아닌 ‘가톨릭’이다.

영어로는 ‘캐설릭’에 가깝지만 천주교는 라틴어를 기준으로 하기에 ‘가톨릭’을 공식 표기로 정했다.

 

 

 

10. 도대체

 

 

 

 

 

도대체(都大體)는 한자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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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및 출저 :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50568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Korean Comfort Women

일본군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 49: 한국인 위안부들

 

1 Oct 1944

1944101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인디아-버마 전역에 부속된

 

미합중국

전쟁 정보국

심리전팀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Interrogated: Aug. 20 - Sept. 10, 1944  
심문 일자 : 1944820- 910

 

Date of Report: October 1, 1944

보고 일자 : 1944101


By: T/3 Alex Yorichi

심문 주체 : 알렉스 요리치

Prisoners: 20 Korean Comfort Girls

포로 :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


Date of Capture: August 10, 1944

생포 일자 : 1944810


Date of Arrival: August 15, 1944

도착 일자 1944815
at Stockade  

 

 



PREFACE

서문

This report is based on the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 interrogation of twenty Korean "comfort girls" and two Japanese civilians captured around the tenth of August, 1944 in the mopping up operations after the fall of Myitkyina in Burma.


이 보고서는 버마 미트키나 함락 이후 소탕 작전 중 810일에 포로가 된 2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2명의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심문으로부터 기초한 것이다.


The report shows how the Japanese recruited these Korean "comfort girls",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lived and worked, their relations with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soldier, and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litary situation.

 

이 보고서는 일본인들이 이 한국인 "위안부들"을 어떻게 모집했으며, 그들이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하고 일했으며, 그들의 일본 군인과의 관계와 군대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줄 것이다.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or "professional camp follower" attached to the Japanese Army for the benefit of the soldiers. The word "comfort girl" is peculiar to the Japanese. Other reports show the "comfort girls" have been found wherever it was necessary for the Japanese Army to fight. This report however deals only with the Korean "comfort girls" recruited by the Japanese and attached to their Army in Burma. The Japanese are reported to have shipped some 703 of these girls to Burma in 1942.


"위안부"는 병사들을 위해 일본군에 붙여진 창녀 혹은 "직업적인 종군 민간인"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 comfort girl'이란 용어는 일본인들 특유의 표현이다. 다른 보고서들도 이 "위안부들"이 전투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필요한 어느 곳이든 발견됨을 보여준다. 이 보고서는 그러나 일본인에 의해 모집되어 버마의 그들 군대에 붙여진 한국인 "위안부"들에 대해서만 다룰 것이다. 일본인들은 1942년에 버마로 이러한 위안부들을 703명 가량 데려왔다고 보고된다.

 


RECRUITING
모집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19425월초, 일본인 업자들은 새로 정복된 동남아시아의 일본 영토로 갈 "위안 서비스"을 위한 한국인 여자들을 모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서비스"의 성격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부상병들을 돌보고, 붕대를 감아주고, 일반적으로 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 설명되었다. 이 업자들의 권유는 풍성한 돈, 가족의 빚을 청산할 기회, 쉬운 일,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장밋빛 전망 등이었다. 이러한 거짓된 설명 하에 많은 여자들이 해외에서의 일을 위해 모집되었고 선금으로 몇 백엔의 보상을 받았다.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여자들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무학이었는데개중 몇몇은 모집 이전에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의 종사자였다. 그녀들이 서명한 계약은 미리 선금으로 지급된 가족 연대채무의 액수에 따라 6개월에서 1년까지의 기간 동안 그녀들을 위안소 업자와 군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였다.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Japanese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대략 800여명의 이 여자들은 위의 방법으로 모집되었으며 그들은 820일 즈음에 랭군에 일본인 '위안소 업자 house master'들과 함께 상륙하였다. 그들은 8명에서 22명 사이 그룹으로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버마의 여러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주로 일본군 병영 근방의 규모있는 도시에 배치되었다.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이들 그룹 중 네 그룹은 미트키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가게 될 위안소들의 이름은) 쿄에이, 킨스이, 바쿠신로, 모모야였다. 쿄에이 위안소는 원래 "마루야마 클럽"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가 해당 위안소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여 이 여성들이 도착하기 전에 개칭되었다.

 


PERSONALITY

인성

The interrogations show the average Korean "comfort girl" to be about twenty-five years old, uneducated, childish, and selfish. She is not pretty either by Japanese of Caucasian standards. She is inclined to be egotistical and likes to talk about herself. Her attitude in front of strangers is quiet and demure, but she "knows the wiles of a woman." She claims to dislike her "profession" and would rather not talk either about it or her family. Because of the kind treatment she received as a prisoner from American soldiers at Myitkyina and Ledo, she feels that they are more emotional than Japanese soldiers. She is afraid of Chinese and Indian troops.

 

심문은 평균적인 한국인 "위안부"가 대략 25세 내외이며, 무학이며, 유치하며, 이기적임을 보여준다. 그녀는 일본인 혹은 코카시안의 기준으로도 예쁘지 않다. 그녀는 자기중심적이며 그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낯선 자들 앞에서의 그녀의 태도는 조용하며 점잖빼는 모습이지만, "여자의 속임수를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직업"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며 그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미트키나와 레도에서 미군으로부터 포로로서 받은 친절한 대접 때문에, 그녀는 미군이 일본군에 비해 보다 정에 무르다고 느낀다. 그녀는 중국군과 인도군을 두려워한다.


LIVING AND WORKING CONDITIONS

생활과 업무 조건

In Myitkyina the girls were usually quartered in a large two story house (usually a school building) with a separate room for each girl. There each girl lived, slept, and transacted business. In Myitkina their food was prepared by and purchased from the "house master" as they received no regular ration from the Japanese Army.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is was especially true of their second year in Burma.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They were able to buy cloth, shoes, cigarettes, and cosmetics to supplement the many gifts given to them by soldiers who had received "comfort bags" from home.

 

미트키나에서 여성들은 대개 큰 2층 가옥(주로 학교 건물이었던)에서 생활했으며 각 여성마다 하나의 독립된 방을 제공받았다. 그 방에서 각각의 여성들은 생활하고, 자고, 비즈니스를 행하였다. 미트키나에서 그들의 음식은 위안소 업자를 통해 제공받아 구매하였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식량 배급을 받지는 않았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버마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수준으로 살았다. 이는 버마에서의 2년째 생활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은 (병사들과 달리) 음식과 물품이 심하게 통제되어 배급되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구매할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잘 살았다. 그들은 옷, 신발, 담배, 화장품을 살 수 있었으며 집으로부터 "위안 가방"을 우송받은 병사들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While in Burma they amused themselves by participating in sports events with both officers and men, and attended picnics, entertainments, and social dinners. They had a phonograph and in the towns they were allowed to go shopping.

 

버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장교들과 다른 남자들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하였으며 소풍과 각종 오락, 사교적 저녁 식사 등에 참가하며 스스로를 즐겁게 하였다. 그들은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PRIOR SYSTEM

(이용의) 우선순위 시스템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transacted business were regulated by the Army, and in congested areas regulations were strictly enforced. The Army found it necessary in congested areas to install a system of prices, priorities, and schedules for the various units operating in a particular areas. According to interrogations the average system was as follows:

 

그들이 일하는 조건은 군에 의해 규제되었으며, (위안소 이용이 많아붐비는 지역에서는 규칙이 엄격히 적용되었다. 군은 이용이 붐비는 지역에서 (직위에 따른차등 가격, (직위에 따른 위안소 이용의) 우선 순위, 특정 지역에서 작전하는 다양한 부대의 스케쥴 등을 고려한 위안소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1. Soldiers

10 AM to 5 PM

1.50 yen

20 to 30 minutes

2. NCOs

5 PM to 9 PM

3.00 yen

30 to 40 minutes

3. Officers

9 PM to 12 PM

5.00 yen

30 to 40 minutes

 

 

1. 사병 : 오전 10시에서 오후 5. 1회 이용 시간 20분에서 30. 요금 1.5

 

2. 하사관 : 오후 5시에서 오후 9.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 요금 3

 

3. 장교 : 오후 9시에서 자정. 1회 이용 시간 30분에서 40. 요금 5 

 


These were average prices in Central Burma. Officers were allowed to stay overnight for twenty yen. In Myitkyina Col. Maruyama slashed the prices to almost one-half of the average price. 

 

위의 요금은 중부 버마에서 평균 가격들이었다. 장교들은 20엔을 내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미트키나에서 마루야마 사령관은 위안소의 요금을 평균 가격의 거의 절반으로 깎아버렷다.

 


SCHEDULES

일정

The soldiers often complained about congestion in the houses. In many situations they were not served and had to leave as the army was very strict about overstaying. In order to overcome this problem the Army set aside certain days for certain units. Usually two men from the unit for the day were stationed at the house to identify soldiers. A roving MP was also on hand to keep order. Following is the schedule used by the "Kyoei" house for the various units of the 18th Division while at Naymyo.


병사들은 종종 위안소가 붐비는 것에 대해 불평하였다.  많은 상황에서 그들은 이용을 하지 못하였으며, 군은 이용 시간 초과에 대해 매우 엄격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은 특정 부대에 대해 특정 이용 일자를 지정하였다. 대개 부대에서 2명이 차출되어 위안소에 상주하며 병사들의 신원을 (위안소의 중복 이용를 하지 못하도록) 확인하였다. 위안소의 질서 유지를 위해 헌병 또한 순찰하였다. 아래는 나이묘의 제 18사단의 여러 부대에 대해 쿄에이 위안소에서 사용된 일정이다.

 

Sunday

18th Div. Hdqs. Staff

Monday

Cavalry

Tuesday

Engineers

Wednesday

Day off and weekly physical exam.

Thursday

Medics

Friday

Mountain artillery

Saturday

Transport

 

 

일요일 :  18사단 사령부

 

월요일 : 기병대

 

화요일 : 공병대

 

수요일 : 휴일 겸 주간 신체 검사

 

목요일 : 의무병대

 

금요일 : 산악 포병대

 

토요일 : 수송부대

 


Officers were allowed to come seven nights a week. The girls complained that even with the schedule congestion was so great that they could not care for all guests, thus causing ill feeling among many of the soldiers.

 

장교들은 일주일 중 아무 날이나 이용이 가능하엿다. 여성들은 이러한 (지정일이 있는스케쥴에도 불구하고 붐빔이 너무 심하여 모든 손님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기분이 나쁘게 되었다고 불평하였다.

Soldiers would come to the house, pay the price and get tickets of cardboard about two inches square with the prior on the left side and the name of the house on the other side. Each soldier's identity or rank was then established after which he "took his turn in line". The girls were allowed the prerogative of refusing a customer. This was often done if the person were too drunk.

 

군인들은 위안소에 와서 돈을 지불하고 표를 샀는데, 표는 2인치 정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왼쪽에는 직급이 찍혀 있고 오른 쪽에는 위안소 명칭이 적혀 있었다. 각 군인의 직급은 그가 어느 줄에 설 지 결정한 다음 확인되었다. 위안부들은 고객을 거절하는 특권이 허락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종종 고객이 너무 취했을 때 발생하였다.


PAY AND LIVING CONDITIONS

급여와 거주 조건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위안부 업자는 여성들이 처음 계약시 받은 돈(선대금)이 얼마냐에 따라 위안부들의 총수입의 50에서 6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였다. 이는 평균적인 한 달 동안 한 위안부가 1,500엔 가량의 수입을 올리며 이 중 750엔을 업자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업자들은 식료품이나 기타 물품을 위안부들에게 고액을 받고 팔아 이 여성들을 힘들게 하였다.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1943년 후반에 군은 (위안소 업자에게) 빚을 다 갚은 여성들은 귀국할 수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위안부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추가적인 심문은 이 여성들의 건강이 매우 좋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피임 기구들을 잘 공급받았으며, 종종 병사들이 군에서 지급받은 피임도구들을 지참하고 왔다. 위안부들은 자기 자신들과 고객들을 위생이란 측면에서 세심하게 보살피도록 교육받았다. 일본군 군의관이 주 1회 정기적으로 위안소를 방문하였고 병에 걸린 여성이 발견되면 누구든 격리되어 치료를 받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와 동일한 과정은 군대 자체에도 적용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군인은 병원에서 치료받은 기간에도 (위안부와 달리) 월급을 지급받았다는 점이다.

 


REACTIONS TO JAPANESE SOLDIERS

일본 군인들에 대한 반응

In their relations with the Japanese officers and men only two names of any consequence came out of interrogations. They were those of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and Maj. Gen. Mizukami, who brought in reinforcements. The two were exact opposites. The former was hard, selfish and repulsive with no consideration for his men; the latter a good, kind man and a fine soldier, with the utmost consideration for those who worked under him. The Colonel was a constant habitu of the houses while the General was never known to have visited them. With the fall of Myitkyina, Col. Maruyama supposedly deserted while Gen. Mizukami committed suicide because he could not evacuate the men. 

 

일본군 장교들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에서는 단지 2명의 의미있는 이름만이 등장하엿다. 그들은 미트키나 수비대 사령관 마루야마 대좌과 증원부대로 온 미즈아키 소장이었다. 이 둘에 대한 (위안부들의) 평판은 정반대였다. 마루야마 대령은 완고하고, 이기적이며, 혐오스러웠으며 부하들에 대해 배려가 전혀 없었다. 미즈아키 소장은 선하고 친절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자기 밑에서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앞에서 말했듯이 위안소 요금을 절반으로 낮추어 업자와 위안부들의 원성을 샀을 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위안소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나, 미즈아키 소장은 한 번도 위안소를 이용한 적이 없었다.

 

(위안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트키나 함락 때 마루마야 대좌는 아마도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즈아키 소장은 부하들을 탈출시키지 못한 책임감으로 자살하였다.

 

 

SOLDIERS REACTIONS
군인들의 반응


The average Japanese soldier is embarrassed about being seen in a "comfort house" according to one of the girls who said, "when the place is packed he is apt to be ashamed if he has to wait in line for his turn". However there were numerous instances of proposals of marriage and in certain cases marriages actually took place.

 

평균적인 일본군은 '위안소'에 나타나는 것을 당황스러워하였다. 한 위안부는 이렇게 말하였다.

 

"위안소가 붐빌 때 (군인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수치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나 (군인들이 위안부와 사랑에 빠져) 청혼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위안부와 결혼을 하기도 하였다.


All the girls agreed that the worst officers and men who came to see them were those who were drunk and leaving for the front the following day. But all likewise agreed that even though very drunk the Japanese soldier never discussed military matters or secrets with them. Though the girls might start the conversation about some military matter the officer or enlisted man would not talk, but would in fact "scold us for discussing such un-lady like subjects. Even Col. Maruyama when drunk would never discuss such matters." 

 

모든 위안부들은 가장 최악의 고객은 만취한 자들과 다음날 전선으로 떠날 사람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하였다. 그러나 비록 술에 취했을 경우에도 일본군은 그 누구도 결코 군 내부의 문제나 기밀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위안부들이 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하려고 해도 장교들은 그에 응하지않았고 때로는 "여성 답지 못한 문제를 이야기하려 한다"고 꾸짖었다 한다. 마루야마 대좌조차도 취했을 때에도 그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The soldiers would often express how much they enjoyed receiving magazines, letters and newspapers from home. They also mentioned the receipt of "comfort bags" filled with canned goods, magazines, soap, handkerchiefs, toothbrush, miniature doll, lipstick, and wooden clothes. The lipstick and cloths were feminine and the girls couldn't understand why the people at home were sending such articles. They speculated that the sender could only have had themselves or the "native girls". 

 

군인들은 종종 고향으로부터 편지, 잡지, 신문을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위안부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또한 통조림, 잡지, 비누, 손수건, 치솔, 인형, 립스틱옷감 등이 들어있는 "위문 가방"을 받았다고 위안부들에게 말하였다. 립스틱와 옷감은 여성용이라서 위안부들은 왜 고향 사람들이 이러한 물건을 군인들에게 보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해당 물건을 보낸 발송인이 아마도 군인들의 애인일 것이라서 (사용하던 물건을 보낸 것이라추측하였다.

 


MILITARY SITUATION

군의 상황

 

"In the initial attack on Myitkyina and the airstrip about two hundred Japanese died in battle, leaving about two hundred to defend the town. Ammunition was very low. 

 

미트키나와 활주로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서 2백명의 일본군이 전사하였고 그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2백명을 남겨두고 퇴각하였다. (일본군의) 탄약은 매우 부족하였다.


"Col. Maruyama dispersed his men. During the following days the enemy were shooting haphazardly everywhere. It was a waste since they didn't seem to aim at any particular thing. The Japanese soldiers on the other hand had orders to fire one shot at a time and only when they were sure of a hit." 

 

마루야마 대좌는 부하들을 넓게 산개시켰다. 다음 날 적군(미군)은 모든 곳에서 위험스러운 총격을 가했으나 특정한 목표를 겨눈 것이 아니라서 (탄약의) 낭비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적을 명중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할 때만 (연사하지 않고) 1회씩 발사하도록 명령받았다.


Before the enemy attacked on the west airstrip, soldiers stationed around Myitkyina were dispatched elsewhere, to storm the Allied attack in the North and West. About four hundred men were left behind, largely from the 114th Regiment. Evidently Col. Maruyama did not expect the town to be attacked. Later Maj. Gen. Mizukami of the 56th Division brought in reinforcements of more than two regiments but these were unable to hold the town. 

 

적이 서쪽 활주로를 공격하기 전에, 미트키나 주둔 병사들은 북부와 서부 쪽의 연합군에게 강습을 가하기 위해 어딘가로 파송되고 있었다. 대략 400명의 병사가 남겨졌는데 주로 제 114연대였다. 마루야마 대좌는 분명 그 도시가 공격받을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제 56 사단의 미즈아키 소장이 2개 연대 이상의 증원군을 제리고 왔으나 그들로서도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It was the consensus among the girls that Allied bombings were intense and frightening and because of them they spent most of their last days in foxholes. One or two even carried on work there. The comfort houses were bombed and several of the girls were wounded and killed.

 

연합군의 폭격이 맹렬하고 위협적이었다는 것이 위안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을 대부분 방공호에서 보냈다. 한 두 명은 그 와중에도 일을 수행하였다. 위안소도 폭격을 받았으며 위안부 중 몇몇이 부상당하고 사망하였다.


RETREAT AND CAPTURE

퇴각과 생포


The story of the retreat and final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is somewhat vague and confused in their own minds. From various reports it appears that the following occurred: on the night of July 31st a party of sixty three people including the "comfort girls" of three houses (Bakushinro was merged with Kinsui), families, and helpers, started across the Irrawaddy River in small boats. They eventually landed somewhere near Waingmaw, They stayed there until August 4th, but never entered Waingmaw. From there they followed in the path of a group of soldiers until August 7th when there was a skirmish with the enemy and the party split up. The girls were ordered to follow the soldiers after three-hour interval. They did this only to find themselves on the bank of a river with no sign of the soldiers or any means of crossing. They remained in a nearby house until August 10th when they were captured by Kaahin soldiers led by an English officer. They were taken to Myitkyina and then to the Ledo stockade where the interrogation which form the basis of this report took place.

 

퇴각과 최종적으로 사로잡히게 된 과정을 이야기할 때 위안부들은 다소 불명확하고 혼란스러워보였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 731일 밤에 세 위안소(이때 바쿠신로 위안소는 킨스이 위안소와 통합된 상태였다)의 위안부들, 여러 가족들, 보조자들이 포함된 63명의 일행이, 작은 보트에 나누어타고 이라와디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내 와잉마우(Waingmaw) 근처의 어딘가에 상륙하였는데, 그곳에서 84일까지 머물렀는데, 와잉마우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그들은 한 부대를 따라갔는데 87일에 소규모 접접이 일어나면서 일행이 쪼개지게 되었다. 위안부들은 3시간 간격을 두고 군인들을 따르라고 명령받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명령을 따랐으나 마침내 어느 강둑에서 병사들을 놓치고 강을 건널 수단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근처의 가옥에서 810일까지 머무르다가 영국 장교가 인솔하는 카힌 부대(인도인 현지 부대인 듯 하다)에 의해 생포되었다. 그들은 미트키나로 이송된 후 다시 레도 진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이 보고서의 기반이 되는 심문이 진행되었다.


 
REQUESTS

요청들

None of the girls appeared to have heard the loudspeaker used at Myitkyina but very did overhear the soldiers mention a "radio broadcast."

 

여성들 중 누구도 미트키나에서 사용된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했으나 군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언급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은 있었다(미군의 심리전 방송을 말하는 듯).


They asked that leaflets telling of the capture of the "comfort girls" should not be used for it would endanger the lives of other girls if the Army knew of their capture. They did think it would be a good idea to utilize the fact of their capture in any droppings planned for Korea.

 

그들은 "위안부들"을 생포했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일본군에게) 뿌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만약 일본군 측이 그들의 생포를 알게 되면 (부대에 있는) 다른 위안부들의 생활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포 사실이 한국에 살포하기로 계획된 전단지에 활용되는 것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1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2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3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4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5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6페이지

 

 

▲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미군 보고서 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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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맥주는 괜찮아" "막걸리는 음료수야" "그냥 소주 한 병인데 뭘"

"양주는 쌔니까 천천히 마셔야되"  같은 음주 철학이 있는데,

솔직히 정확한 음주량이 환산이 안되서 마시다가 몸이 무너지는 경험들 다들 해봤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주를 기준으로, 각 술들이 얼마만큼의 전투력(알콜량)을 보유했는지를 알아보고 

자신에 주량에 맞는 음주량을 체크 해보도록 할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술의 종류들과 그 도수 등을 나타낸 표이다.

각각의 도수는 평균적인 도수를 써놓은 것이고 약간의 도수차가 있을 수 있지만,

어차피 개략적인 알콜량을 아는게 목적이니 대충 근사값으로 넘어가자.

 

 

 

1. 저알콜 계열

 

 

많이들 오해하는게 맥주나 막걸리는 몇 잔씩 마셔도 소주 마시는 것 보다 낫다라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실 맥주 500cc 한 잔이면 소주 1/3에 버금가니,

3잔쯤 마시면 소주 한 병을 마신 것과 같은 알콜량을 섭취하게 된다

 

.

막걸리는 결코 알콜량이 적지 않은 술이다. 막걸리 3병이면 소주 2병을 마신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대게들 막걸리 사발에 두번에서 세번 정도 먹는 양이 얼마나 대수겠는가 하는데

사실 막걸리 4~5잔 이면 소주 1병을 마신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저알콜 술이 위험한게, 소주는 차라리 애들이 많이 먹고 데여봐서 서서히 먹는데

이런 술은 분위기타고 여자던 남자던 쉽게쉽게 마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보면 한 사람당 막걸리 3병씩 대수롭지 않게 먹고 있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통에 담겨서 온다면?

 

 

 

 

 

저거 하나에 양심적인 가게라면 막걸리 3통 들어가는데, 대략 소주 2병 정도 라고 보면된다.

예컨데, 막걸리 마셔서 숙취가 더 하다?

이건 곡주라서 소화가 더부룩 할 수 도 있지만, 대가리가 아픈건 엄연히 알콜을 많이 처먹어서 그런게 더 크다.

 

 

 

2. 고알콜 계열

 

 

 


 

와인은 그냥 구색 맞추려고 넣었다. 와인을 앉은 자리에서 두 병씩 처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기서 관건은 소주의 파괴력이다. 일반적인 술 초짜들이 위스키는 강하다, 소주는 약하다 라는 선입견을 갖는데

소주는 사실 "매우 강력한 주류"다. 소주 2병을 마시는 것은 위스키 큰거 반병을 처먹은것과 같다.

 

 

예를들어서 앉은자리에서 소주 4병을 처먹는 것은

데낄라나 보드카 1병을 앉은 자리에서 혼자 까먹었다는 거랑 똑같은 소린데, 사실 그건 개구라일 확률이 높다. 

자기가 정신을 차리니 지 앞에 소주 4병이 보여서 주량이 4병이라고 보는거지

소주 4병을 혼자 까는거는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짧게 주종별 도수에 대해 알아봤다. 알고 맛있게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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