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은 실리콘밸리의 원년으로 불리는 해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 까지 실리콘밸리는 농업을 주로 하는 촌이었다. 이 때, 실리콘밸리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쇼클리라는 박사가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낙후된 촌동네인 실리콘밸리에서 근무를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윌리엄 박사는 자신이 직접 20명의 연구원을 영입하게 되는데,
여기에 인텔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와 로버트노이스, amd창업자 제리 샌더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쇼클리 반도체에서 연구를 하던 연구원들은 쇼클리박사와 생각과 연구방향이 달랐고
결국 8명의 엔지니어들이 쇼클리 연구소를 나와 독자노선을 걷게 된다. 이윽고 기업을 만들게 되는데 그게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익숙한 회사이다.
1957년 당시 소련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인공위성을 우주에 쏘아올렸고, 미국은 거기에 충격을 받아서 NASA를 설립하고 대대적으로 우주항공과학에 투자를 하게 되면서
고온에서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전자 부품이 요구되었는데,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값은 비싸지만
고온에도 안정적이었던 실리콘 직접회로를 개발하여 세계최초로 반도체 양상에 성공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런데 페어차일드 회사를 설립할 때 자금을 출자한 창업주가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우했다고 느꼈던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제리 샌더스는 페어차일드에서 나와
다시금 독자적인 기업을 차리게 되는게 그게 바로 오늘날의 인텔과 AMD이다.
처음 인텔의 사명을 제작할 때, 노이스 무어 일레트로닉스(noyce-moore electronics)로 만들려고 했지만
잡음을 뜻하는 noise와 많다를 뜻하는 more의 합성어로 잡음이 많다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켰다.
종래에는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의 앞글자를 조합해서 인텔(intel)이 되었다.
인텔은 창립 초기에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던 회사였는데,
1960년대 미국 기업들은 회계 시스템이나 급여 장부, 의료 기록 등을 관리하기 위해 '메인프레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인프레임의 메모리 장치는 낙후된 상태였고,
그래서 시장은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쉽게 저장할 수 있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새로운 컴퓨터를 원했고, 이 시장이 커질것이라고 예측한 고든 무어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어의 법칙이야.
*무어의법칙*
24개월마다 칩에 집적할 수 잇는 트랜지스터 수가 2배씩 증가 한다는 것
인텔은 1970년 인텔은 인텔 1103이라는 1kbit DRAM을 출시하면서
인텔 1103은 2년 만에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반도체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인텔은 유명한 메모리 회사가 되었고, 1971년 공식적으로 첫 흑자를 기록하였다.
이후 인텔은 인텔 4004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에 진출했고 인텔 8088의 성공 덕에,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과 함께 1970년대에 접어들어 인텔은 엄청난 성장을 하게되는데,
1980년대 일본 반도체 회사들이 우후죽순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인텔의 방향은 바뀌었다.
인텔은 cpu사업에 집중을 하면서 8086이라는 cpu를 만들고 그후 8088이라는 cpu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 cpu가 컴퓨터완성업체 1위 기업인 ibm컴퓨에 사용되면서 인텔은 엄청나게 성장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로 인해 전 세계적인 압도적인 반도체 1위 회사로 군림을 하게되었고,
인텔은 이제 ibm이랑 협력을 하는게 아닌 독자 노선으로 cpu를 판매하기로 결정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90년에 들어 서면서 전 세계에 데스크탑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이때 한국에도 데스크탑이 보급되고 pc방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데스크탑을 구매하게 되면서
한국에도 인텔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컴퓨터 cpu는 인텔의 팬티엄 이라는 공식이 생기게 된다.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에 컴퓨터를 구매하면 본체에 이런 스티커가 붙어있는걸 많이 볼 수 있었다. 인텔은 팬티엄1 팬티엄2 팬티엄3 팬티엄4와 첫 듀얼코어 cpu인 팬티엄d까지 만들어 내는데
이 때 팬티엄4때 잠깐 인텔이 주춤하게 되면서 amd가 cpu시장에서 치고 올라오게 된다.
그후 인텔은 코어2듀오 울프데일 요크필드 켄츠필드 같은 cpu를 만들면서 amd에 반격을 하게되는 양상으로 접어든다.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서 인텔은 새로운 cpu 시리즈를 런칭하게 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코어i시리즈이다. 코어 i시리즈 1세대 린필드가 발표 되면서 인텔은 완전히 amd를 밟아 버리게 되고,
2세대 초 명작 샌디브릿지가 나오면서 amd와 다시금 격차를 크게 벌리게 되다.
그러나 인텔은 완전히 cpu시장은 본들의 독점시장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더이상의 기술 개발 투자는 하지 않고 클럭만 조금 올리고 메인보드 소켓만 바꾸는 장난질을 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 들이게 된다.
이 메인보드 소켓 장난질에 슬슬 소비자들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인텔 말고는 대체할 cpu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은 울며겨자 먹기로 인텔 제품을 계속해서 구입을 하게되는데 이때 영원히 나락일줄 알았던 amd가
mit 출신 박사를 영입해서 반격을 할려고 준비를 하게 된다.
인텔에 밀려 영원히 나락으로 떨어질것만 같았던 AMD는 리사 수의 영입으로 반전을 맞이한다. 데스크탑과 랩탑 vga시장은 엔비디아, cpu시장은 인텔이 꽉 잡고 있는 형국에서
amd는 틈새 공략을 하게 되는데 바로 콘솔 시장이다. amd는 ps xbox 에 자신들에 회사 cpu와 라데온그래픽 카드는 공급하여 돈을 벌고
그 돈을 이용해서 cpu를 새로 개발하여 반전의 무기로 꺼내드는데, 바로 라이젠이다.
라이젠은 처음 출시했지만 역시나 cpu시장은 인텔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판매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amd는 3가지 전략을 펼치는데,
첫번째는 인텔보다 많은 코어와 쓰레드 두번째는 인텔보다 저렴한 가격 세번째는 2020년 라이젠4세대가 나올때까지 메인보드 소켓을 바꾸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에 인텔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많은 구매로 이어졌고,
amd는 그 돈으로 라이젠 2세대 피나클릿지 3세대 마티스 까지 출시를 하게 되는데
하지만 역시 태생정 한계때문에 amd cpu는 인텔 cpu성능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amd cpu는 ccx 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cpu인데 2개 코어를 인피니티 패브릭으로 연결해서
io다이에 연결하는 방식으로,
ccx구조의 장점은 낮은 단가로 많은 코어와 쓰레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는 자본이 인텔에 비해 부족한 amd에게는 딱 알맞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그림은 라이젠 CPU 구조인데, 왼쪽은 ccx 2+2 구조로 되어있고 왼쪽 ccd는 원칩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사로 치면 ccx 사장->이사->직원으로 소통이 된다면,
ccd는 사장->직원으로 바로 소통이 되기때문에 amd의 cpu는 한단계 더 거치는 과정으로
지연시간이 발생되는데 그게 바로 레이턴시 라고 한다.
그래서 amd도 이 레이턴시를 줄이기 위해서 드디어 4세대 베르메르 에서는 ccd구조된 cpu를 출시하고
기업 역사상 사상 처음으로 인텔cpu를 성능으로 역전하는 이변을 일으킨다.
사실 amd는 ccd구조의 cpu를 만들 자본과 기술력이 없었는데,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인텔의 ceo 크르자니크 라는 사람이었다.
크르자니크는 코어 i시리즈 출시이후 인텔이 cpu시장을 점령했다고 판단하여 cpu시장에 돈을 투자를 하지 않고
기업의 수익으로 여러가지 신규사업 모바일 사업에 투자를 하게 되는데 결국 전부 다 실패를 하게 된다.
거기다가 amd가 점유율을 조금씩 높여오는 동안 4코어 8쓰레드 까지만 만들면 됐던 cpu도 코어와 쓰레드를 늘리게 되면서 생산단가가 늘어나고
모바일 사업부의 실패로 인해서 회사의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으므로 큰 타격이었다.
이때 다시 크르자니크까 회사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 한가지 결정을 하는데 그게 바로 구조조정을 감행한다.
이때 크르자니크가 자사의 엔지니어들을 대거 해고하는 일을 벌이는데, 이것이 큰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로 2020년 지금도 10nm 7nm 로 미세공정 진입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때 해고당한 인텔 엔지니어들이 삼성, 애플, amd, 아마존, 구글, ms 등지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amd가 ccd구조의 기술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인텔이 큰 결정을 하는데 바로 제조업의 포기이다. 인텔은 제조와 설계를 모두 하는 반도체 기업인데 인텔이 제조업 포기 선언을 하면서 인텔의 주가는 폭락하게 되고
전 세계 1위 였던 인텔이 하청업체 tsmc와 인텔 눈치나 보던 삼성전자, 인텔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던 엔비디아에게
시가총액이 역전을 당하게 되면서 제국의 몰락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최근에는 sk 하이닉스에 10조3000억에 낸드플래시 사업부 까지 판매하면서 제조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이러한 애플 에어팟 3세대는 그간 애플의 네이밍 성향상 에어팟 SE가 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애플은 내년 상반기에 새로운 저가형 에어팟 출시를 내부적으로 논의했다고 한다.
블룸버그는 26일(현지시간) 애플이 2021년 에어팟 이어버드에 대한 업데이트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애플은 3세대 보급형 에어팟과 에어팟 프로 이어버드의 두번째 버전 등 두 가지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 모델은 홈팟 미니 및 곧 출시 될 오버 이어 헤드폰과 같은 새로운 애플 오디오 장치와 결합된다"라며 "홈팟 미니와 원래 버전 사이에 놓을 또 다른 스마트 스피커도 출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업데이트 된 보급형 에어팟의 디자인은 현재 에어팟 프로와 비슷하다"라며 "배터리 수명은 개선될 것이지만 소음 제거와 같은 고급 에어팟 프로 기능은 갖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새로운 에어팟 프로의 경우 튀어 나온 짧은 줄기를 제거해 이어 버드를 더 컴팩트하게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테스트 중인 디자인은 삼성전자, 아마존, 구글의 최신 디자인과 유사하게 사용자의 귀를 더 많이 채울 수있는 더 둥근 모양이다.
두 모델에 전력을 공급할 새로운 무선 칩을 계획하고 있으며 럭스셰어정밀과 고어텍이 새로운 이어 버드 생산의 대부분을 처리 할 것으로 예상된다.
블룸버그는 "애플은 여전히 고급형 노이즈 캔슬링 오버 이어 헤드폰을 발표할 계획"이라며 "이 장치는 지난 2년 동안 여러 개발 문제에 직면해 발표가 지연됐다. 이 헤드폰은 몇주 전 생산에 들어갈 예정 이었지만 헤드 밴드 문제로 인해 또 다시 지연된 상태"라며 "당초 헤드폰 측면에 대형 터치 패드를 포함할 예정이었지만 패널 크기가 줄어들었다"라고 전했다.
실질적인 기능 위주와 저렴한 가격으로 다양한 고객층을 흡수중인 애플이 아이폰se와 애플워치se에 이어 에어팟도 se를 내놓는다면 확실히 삼성과 중국회사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기능과 성능 이전에 감성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기에.
가지는 속씨식물문 쌍떡잎식물강 가지목 가지과 가지속에 속하는 한해살이풀 채소이다. 전 세계적으로 식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 원산지는 인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재배되었다. 초여름인 5~6월에 꽃이 피고 여름이 한창일 때인 7~8월에 열매가 익는다. 한자로는 茄子(가자)인데 이것의 발음이 변해 '가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대개 가지라 하면 열매를 지칭하며, 검은 자줏빛의 외피와 흰 과육으로 이루어졌다. 신선한 가지는 열매 꼭지 부분에 가시가 있어 주의해야 하며, 검은 빛깔의 껍질에는안토시아닌이 많이 들어있다.
이러한 안토시아닌의 주요 효능에는 항산화, 항염, 항암, 항바이러스, 심장병·동맥경화예방, 노화방지 등의 효과가 있다. 모든 세포는 대사활동을 하는데,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산소가 필요하다. 세포는 산소를이용하여 활동을 하고 또, 활성산소를 내뿜어 점점 산화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늙는 것도, 점점 쇠약해지는 것도 세포의 산화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안토시아닌이 함유된 음식을 먹으면 여러 질병 예방과 노화방지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가지에는 이러한 안토시아닌이 750mg정도 함유되어 있는데 이정도의 수치는 보라색의 자색고구마의 절반정도, 일반 고구마의 5배정도 되는 양이며, 또다른 보라색 채소인 적상추나 비트에 비해 대략 10배정도의 양을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가지를 먹는것이 간편하고도 많이 섭취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가지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소화와 대사작용에 좋다. 식이섬유의 효능은 따로 설명이 없어도 잘 알 것이다.
익히지 않은 가지를 먹으면 약간 알싸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이는 솔라닌 때문이다. 싹이난 감자를 먹었을 때 그 느낌이 솔라닌 때문인데, 가지나 고추, 담배, 토마토 등 가지과 식물 대부분에는 감자 독으로 유명한 솔라닌이 있다. 덜 익은 가지의 솔라닌은 싹 난 감자처럼 많지는 않지만, 날로 먹으면 아린 맛이 날 뿐더러 복통, 호흡 곤란이 올 수 있다. 푸른 토마토에도 있는 솔라닌은 280도가 넘어야 분해되므로 끓여도 안 없어지지만 익은가지와 토마토는 독이 없어지기 때문에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가지 열매는 오랜 세월 인간에 의해 품종개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의 형태와 달라지게 되었다. 원래는 방울토마토와 비슷하게 작고 동글동글한 열매였으나,지속적인 품종 개량 끝에 굵고 길쭉한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개량 이전의 모습을 보면 감자 열매처럼 생겼다.
몽골족은 수백 년간 통일된 국가가 없이 부족별로 다툼을 일삼거나 주변국인 중국이나 거란, 여진 등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칭기즈 칸의 등장으로 통일된 국가가 성립된 후 팽창을 거듭하여 이내 북중국 및 만주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면서, 좋든 싫든 몽골과 고려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는 조우하게 되었다. 몽골은 거란 격퇴에 공을 구실 삼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고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몽골의 힘을 잘 아는 고려는 이에 응하였고, 일단은 평화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당시 몽골은 세계를 제패할 만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였으며,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주종관계를 맺으면 맺었지 부자관계나 형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은 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지속되면서 60여년 4대째 이어져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에 복속을 청하면서 전쟁은 몽골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고려는 정복당하는 치욕은 피했으나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에 고려는 철령이북과 제주도를 원나라에 할양하였고심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끝내 고려의 영토와 고려 백성들을 자신들의 휘하에 두고 흡수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우선 고려는 영토 대부분이 산지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인력을 들여 관리할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다. 그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주축이 되는 말을 기를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이 정복한 곳 중에서는 넓은 평야와 초원이 있고, 발달한 문화와 높은 생산력을 가진 땅들이 많은데 적은 인구의 몽골제국이 굳이 고려까지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몽골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력하던 간에 그 땅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직접 상주해야 했으므로, 직접 통치하면 오히려 통치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셈이다. 즉 통치 대상에서 순위 밖이었다.
게다가 시대 상황적으로 운이 좋았다. 1259년 형 뭉케가 남송 원정 도중 사망하자, 모든 이목이 쿠빌라이에게 집중 되었다. 칸으로 즉위하는 문제로 막내동생인 아릭부케와 대립했던 것이다. 1260년, 쿠빌라이는 상도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 제5대 대칸에 올랐다.
아릭부케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하는데 킵차크 · 어거데이 · 차가타이칸국이 아릭부케 편에 서고, 훌레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부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칭했다.
원종이 태자일 때 뭉케 칸의 사망으로 몽골제국에서 형제의 난이 발생했고 이때 쿠빌라이를 찾아가 쿠빌라이에 줄을 섰다. 이후 쿠빌라이가 칸에 등극했고 자기 아들 충렬왕과 쿠빌라이 칸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와 혼인을 성사시킨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그 서열이 상승한다. 충렬왕의 부인이 쿠빌라이의 딸이다 보니까 몽골에서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예를 들면 고려의 국정을 간섭하던 다루가치가1278년(충렬왕 4) 원나라에 친조(親朝)하여 그 폐지를 약속받은 뒤 다루가치는 완전히 철수하였다.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몽골과 청나라는 둘 다 유목민족이고 유목민족 입장에서는 고려나 조선은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직접 통치를 하지 않은 거라 봐야한다. 무슨 민족적 동질성 때문에 대우를 해준 거라는 둥 하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렇다보니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처럼 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은 국가들과 달리 고려에서는 몽골인들과 혼혈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즈 칸 유전자인 Y하플로그룹 하플로 C3가 한국인 남성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고 이마저도 남방계C3이다. 하플로 O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제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몽골과의 28년 전쟁 중 피가 섞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몽골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적은 살려두지를 않았다. 생명과 건축물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로마인들의 엔지니어링 기술의 정점을 보여주는 1900년 전 건축물, 판테온(Pantheon).
이 건물은 현재 로마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먼저 판테온은 로마의 초대황제 어거스투스의 절친이자 유능한 장군이었던 마르쿠스 아그리파(Marcus Agrippa)가
BCE 20년경에 완공되었는데 CE 110년경 로마의 큰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PAX ROMANA를 이끈 5현제 시기인
CE 114년 트라야누스(Trajan) 황제가 만들기 시작, 그 후대인 하드리아누스(Hadrian) 황제때인 120년대에 완공된 신전이다.
이 사진에선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데,
우선 첫번째는 가운데 세겨져있는 로마문자이다. 우리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로마문자가 위에 각인되어 있다.
제일 왼쪽엔 M.AGRIPPA라고 쓰여 있는데,
그 부분만큼은 아까 말한대로 M(ARCUS) AGRIPPA 장군이 처음 만들어서 그 이름을 세겨놓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근데 그 이후에 나오는 문자들은 뭘 뜻하는 것일까?
M.AGRIPPA.L.F.COS.TERTIVM.FECIT
여기서 약자로 되어있는 부분을 풀어써보면 M(ARCVS) AGRIPPA L(VCIL) F(ILIVS) CO(N)S(VL) TERTIVM FECIT 이다.
라틴어를 해석해보면, lucil은 아그리파 아버지의 이름 filius는 아들, consul은 집정관 tertium은 3번째, fecit은 만들었다라는 뜻이므로, "LVCIL의 아들 M. AGRIPPA가 세번째로 집정관을 하던 때 만들었다"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한 피스로 된 기둥을 볼 수 있는데, 저런 그리스/로마 양식의 기둥들은
원래 여러 원통들을 쌓아올려서 만드는 형식을 사용한다.
아무래도 저렇게 큰 기둥이 하나로 되어있으면 만들고 옮기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들기 때문. 기원전 430년경 완공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아크로 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다.
역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데, 기둥들을 자세히보면 대략 10개정도의 작은 원통들이 쌓아져서
하나의 기둥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판테온을 약간 옆에서 본 모습. 기둥들은 총 12개가 있다.
하지만 판테온의 기둥은 저런식으로 원통을 쌓은 게 아니라 한피스로 되어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2500 마일이상 떨어져있는 이집트 남부의 Mont Claudianus라는 채석장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
저 기둥 하나의 길이는 대략 12미터, 무게는 100톤에 이른다고 한다.
이집트의 Mont Claudius는 뛰어난 품질의 Egyption grey granite을 생산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최고의 품질을 가진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이 먼곳에서부터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채석장 유적에서 최근 발견된 파피루스에 적힌 기록들을 보면,
각종 음식과 물을 요구하고 일꾼들에게 제공하던 기록들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보면 917명의 인부들에게 물을 나눠줬다는 기록이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둥을 채석하고 운반하기 위해 동원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일꾼들은 100톤짜리 저 기둥들을 100마일 이상 떨어진 나일강까지 운송, 나일강에선 바지선을 통해 운반, 알렉산드리아까지 가서 다시 화물선에 옮겨 로마 옆 항구도시인 오스티아(Ostia)까지 운반, 다시 거기서 바지선으로 티버강 따라 로마에 수송한 것이다. 로마제국 내 발달된 운송 네트워크와 고대시대 이런 건축/자제조달을 할 수 있다는 로마의 발전된 기술력의 산물인 셈.
판테온이 유명한 이유는 사실 이것보단 거대한 돔 구조에 있다.
거의 완벽한 구형을 이룬 돔구조로 되어있다. 가장 위엔 환기를 위한 구멍이 뚫려있는게 특징이다. 이 돔구조는 아래 그림처럼 지름 43.3m의 구를 완전히 채울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만든지 19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안전할 정도로 뛰어난 당시 로마의 콘크리트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판테온은 인류가 만든 가장 큰 돔형 건축물이라는 기록을 20세기 중반까지도 보유하고 있다가,
1958년에 비로소 프랑스 파리에 Center of New Industries and Technologies 건물이 지어지며 넘겨지게 된다.
즉, 현대기술에 필적할 정도의 수준을 이미 고대시대에 보유하고 있었단 이야기.
이런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로마제국의 기술력이 결국 중세암흑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상실,
산업시대에나 재발견되었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잊혀지지않고 이어졌다면 현재의 기술력은 얼마나 발전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