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의 영토를 나타낸 지도
드넓은 몽골 초원지대의 모습 브런치

 

몽골족은 수백 년간 통일된 국가가 없이 부족별로 다툼을 일삼거나 주변국인 중국이나 거란, 여진 등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칭기즈 칸의 등장으로 통일된 국가가 성립된 후 팽창을 거듭하여
이내 북중국 및 만주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면서,
좋든 싫든 몽골과 고려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고려의 대몽 항쟁 역사
100만의 인구로 2억을 지배한 몽골족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두 나라는 조우하게 되었다.
몽골은 거란 격퇴에 공을 구실 삼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고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몽골의 힘을 잘 아는 고려는 이에 응하였고, 일단은 평화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몽골 제국 전성기 영토




여기서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당시 몽골은 세계를 제패할 만한 힘을 가진 강대국이였으며,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주종관계를 맺으면 맺었지 부자관계나 형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은 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결국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지속되면서
60여년 4대째 이어져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에 복속을 청하면서 전쟁은 몽골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고려는 정복당하는 치욕은 피했으나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에 고려는 철령이북과 제주도를 원나라에 할양하였고 심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끝내 고려의 영토와 고려 백성들을 자신들의 휘하에 두고 흡수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산지가 대부분인 한반도의 지형

 

우선 고려는 영토 대부분이 산지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인력을 들여 관리할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다. 그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주축이 되는 말을 기를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이 정복한 곳 중에서는 넓은 평야와 초원이 있고,
발달한 문화와 높은 생산력을 가진 땅들이 많은데 적은 인구의 몽골제국이 굳이 고려까지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몽골 제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력하던 간에 그 땅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직접 상주해야 했으므로,
직접 통치하면 오히려 통치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셈이다. 즉 통치 대상에서 순위 밖이었다.



 

 

 

게다가 시대 상황적으로 운이 좋았다. 1259년 형 뭉케가 남송 원정 도중 사망하자,
모든 이목이 쿠빌라이에게 집중 되었다. 칸으로 즉위하는 문제로 막내동생인 아릭부케와 대립했던 것이다.
1260년, 쿠빌라이는 상도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 제5대 대칸에 올랐다.

 

 

쿠빌라이 칸

 

 

아릭부케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하는데
킵차크 · 어거데이 · 차가타이칸국이 아릭부케 편에 서고, 훌레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부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칭했다.



 


원종이 태자일 때 뭉케 칸의 사망으로 몽골제국에서 형제의 난이 발생했고
이때 쿠빌라이를 찾아가 쿠빌라이에 줄을 섰다.
이후 쿠빌라이가 칸에 등극했고 자기 아들 충렬왕과 쿠빌라이 칸의 딸 홀도로게리미실 공주와 혼인을 성사시킨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그 서열이 상승한다.
충렬왕의 부인이 쿠빌라이의 딸이다 보니까 몽골에서도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 셈이다.



 

 

 

 


예를 들면 고려의 국정을 간섭하던 다루가치가 
1278년(충렬왕 4) 원나라에 친조()하여 그 폐지를 약속받은 뒤
다루가치는 완전히 철수하였다.

 

청나라와 조선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몽골과 청나라는 둘 다 유목민족이고 유목민족 입장에서는 고려나 조선은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에 직접 통치를 하지 않은 거라 봐야한다.
무슨 민족적 동질성 때문에 대우를 해준 거라는 둥 하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렇다보니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러시아처럼 몽골의 직접 통치를 받은 국가들과 달리
고려에서는 몽골인들과 혼혈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즈 칸 유전자인 Y하플로그룹 하플로 C3가 한국인 남성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고 이마저도 남방계C3이다.
하플로 O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제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몽골과의 28년 전쟁 중 피가 섞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몽골 군대는 항복하지 않은 적은 살려두지를 않았다. 생명과 건축물은 모두 파괴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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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우리나라에선 그리 이미지가 좋지 못한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5, 유벤투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유벤투스의 간판급 스타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많은 파장이 예상된다.




포루투칼 국가대표 축구선수 호날두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호날두의 모습
2017 포르투칼 올해의 선수 호날두




포르투갈 축구협회는 13일(한국시간)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호날두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양성 반응을 보였다. 국가 대표팀에서 조기 소집 해제됐고,
스웨덴과 유럽축구연맹(UEFA) 네이션스리그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




 

 

네이션스리그
윙베 할렌




여기서 네이션스리그란 2013년 10월 당시 노르웨이 축구협회장을 역임했던 윙베 할렌(Yngve Hallén)이
모든 UEFA 회원국의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대회 창설을 제안하였으며,
2014년 3월에 당시 유럽 축구 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던 잔니 인판티노
가 지지의사를 표시하여,
2014년 12월 4일 초안이 통과되어, 2018년부터 2년마다 실시하였다.



 

호날두가 간판인 포르투칼 국가대표팀
포르투칼 국가대표 심볼



공식 발표에 따르면, 호날두를 제외한 다른 포르투갈 선수들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다.
모두 음성 반응을 보였으며, 네이션스리그 스웨덴전 대비 훈련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같이 훈련을 받으며 생활하는 선수들끼리 잠복기간까지 고려하여 철저한 검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코로나 극복 메시지를 전했던 호날두




호날두 코로나 양성 반응에 현지 언론도 들썩였다.
포르투갈 매체 '헤코르드' 등은
"포르투갈 공식발표다. 호날두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 판정을 받았다.
따라서 스웨덴전에 불참한다"며 속보를 전달했다.




앞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네이마르




코로나 바이러스가 심폐지구력이 요구되는 축구선수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최악의 경우 호날두의 선수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리 1주기


설리 1주기 추모 다큐멘터리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




10월14일인 오늘 故설리(본명 최진리)의 1주기를 앞두고 

MBC에서 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송된다고 한다.









9일 방송연예가에 따르면 오는 10일 MBC '다큐플렉스'에서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채 우리 곁을 떠난 故설리의 이야기를 다룬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 편을 방송한다.

설리는 사람들의 비난과 악플로 오랫동안 고통받은 연예인이다.








1994년 태어난 설리는 지난 2005년 불과 12세의 나이에 아역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2009년 큰 인기와 관심을 몰고 온 걸그룹 f(x) 멤버로 활동하며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설리는 연예계 활동을 하며 꾸준하게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며 늘 우리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설리가 하는 말, 설리가 하는 행동, 설리의 표정마저도 대중에게는 이슈로 다가왔다. 








극단적인 호불호 속에서 설리는 늘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 당당하게 대처했다. 

그것이 성희롱적인 조롱으로 느껴질 법한 사안에도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늘 당당했다.









대중은 그의 모습을 보고 열광했고 끝없는 응원을 보냈지만 한편에서는 그런 그의 모습을 오해하고 비난하며 편견 속에 가둬버렸다.

특히 페미니즘을 위시한 무리들이 자신들의 사상과는 반대로 되려 당당한 여성 설리를 입에 담기도 힘든 모욕적인 언사로 끊임없이 공격했었다.









하지만 설리는 그 같은 무리들의 시선에 늘 당당했다.

아니면 본인밖에 알 수 없는 마음속 진실로는 계속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팬들과 대중들이 보기엔, 그 자신은 자신이 진실함을 알고 있었고 대중에게 진심으로 다가서려 애썼다. 









대스타이면서도 소소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 등의 SNS에 솔직하게 공개하며 팬들과 소통하던 설리, 

그런 설리의 모습을 응원하며 대중은 큰 지지를 보냈지만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이슈를 몰고다니는 시끄러운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행동을 그저 관심종자라며 단정지어 무리지어 공격했고,

웃기게도 설리가 죽자 태도를 180도 돌변하여 설리를 진정으로 추모하는 양,

마치 한국 남자의 성희롱 때문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무분별하게 인터넷 공간 상에 유포하는 등 매우 악질적인 행태를 보여준다. 









작년 2019년 10월14일, 설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늘 씩씩하고 당당한 줄로만 여겼던 설리가 그렇게 홀연히 떠나버렸다. 

악성 댓글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설리를 향해 도를 넘는 악성댓글을 달았던 사람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웃긴 것은 그 비난을 퍼붓는 자들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래서 MBC 다큐멘터레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 에서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설리의 외로움, 고통, 아픔을 그저 용감하고 씩씩하며 당당했던 

그 이면에 감춰 버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차원에서 접근했으면 한다.









그렇게 아름답고 예뻤던 가수이자 한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25세.








MBC '다큐플렉스'의 '설리가 왜 불편하셨나요?' 편은 오늘 밤 10시 50분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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