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44년의 중국 대륙,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국공내전에서 승리를 앞두고 장제스는 눈물을 훔치며 대만으로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장제스는 자신을 도와주던 미국에게 큰 군함을 몇 척 빌려달라고 하였다.

미국은 당연히 피난민들을 태우겠거니 하고 군함을 빌려주었지만,

 

 

 

 

 

군함에는 대륙 각지에서 긁어모은 유물만 잔뜩 실었고 그 수가 60만 8천 점에 달했다.

피난민은 뒷전이고 문화재부터 먼저 챙긴 것이다. 왜 그랬을까?

 

 

 

 

 

중국 대륙에서는 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전근대 역사에서 모든 왕조들은 정통 계승자임을 과시하기 위해

그 전의 왕조가 소장하고 있던 황실의 보물을 훼손하지 않고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황실이 소장한 보물은 단순히 금은보화라는 차원을 넘어

임금과 그 왕조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상징성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장제스는 피난민 대신에 문화재를 선택한 것이다.

남은 피난민들이 겪은 고초를 생각해보면 비판받을 소지가 있겠으나,

 

 

 

마오쩌둥의 어록을 들고 있는 홍위병들

 

 

1966년 붉은 책을 든 무리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것은 10년 간의 동란 문화대혁명을 알리는 서막이였다.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가서 한 일들을 주욱 살펴보면 문화대혁명이 아니라 문화대파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홍위병들이 박살낸 문화재의 목록 中 일부

  • 염제릉(炎帝陵)의 주전(主殿)은 불에 타고, 능묘는 파헤쳐졌으며, 뼈는 태워져서 뿌려짐.

  • 창힐의 능원은 훼손되고, "열사능원"으로 개조됨.

  • 산서성의 순제릉(舜帝陵)은 훼손되고, 무덤에는 큰 나팔을 꽂아놓음.

  • 절강소흥 회계산의 대우묘(大禹廟)가 훼손됨. 우임금의 조각상은 머리와 목이 잘림.

  • 세계불교의 최고보물이라고 불리는,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친히 개광(開光)한 삼성상(三聖像) 중의 하나일 팔세등신상의 얼굴이 훼손됨.

  • 공자의 묘가 파헤쳐져 편평(扁平)하게 됨. '대성지성선사문선왕(大成至聖先師文宣王)'이라는 비석도 부서져 가루가 됨. 묘비도 부서짐. 공묘(孔廟)의 이태소상(泥胎塑像)도 훼손됨, 공자의 76대손 공령이(孔令貽)의 분묘도 파헤쳐짐.

  • 화현(和縣) 오강(烏江)변의 항우의 패왕묘(霸王廟), 우희묘(虞姬廟: 사당)와 우희묘(虞姬墓: 무덤)도 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묘들이 모두 파헤쳐져 폐허가 됨. 문혁(文革) 이후 패왕묘에 남은 것은 반쯤 땅에 묻힌 석사자(石師子)뿐임.

  • 곽거병의 곽릉(霍陵)도 재난을 벗어나지 못함. 향촉(香燭)과 첨통(簽筒)이 부서진 외에 곽거병의 소상(塑像)도 하루아침에 훼손됨.

  • 이화원(頤和園)의 불향각(佛香閣)이 부서지고, 대불(大佛)이 훼손됨.

  • 왕양명의 문묘(文廟)와 왕문성공사(王文成公祠)의 두 개의 건축과 왕양명의 소상(塑像)이 전부 훼손되고 남지 않음.

  • 고성태원(古城太原)의 신임 시위원회는 첫째 묘우(廟宇: 사당)를 부수어 전시의 190여곳의 묘우 고적(古蹟)을 10여개를 남기고 모두 부수고 훼손함. 그의 명에 따라 100여곳의 고적이 하루아침에 훼멸됨. 산서성박물관 관장이 급히 방림사(芳林寺)로 가서 겨우 이소인두(泥塑人頭: 흙으로 빚어 구운 사람의 머리 형상)를 한 무더기 구해냄.

  •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의 소상이 훼손됨. 묘정(墓亭), 석비(石碑)도 부서짐. 장중경기념관의 전람품은 하나도 남지 않음. 의성사(醫聖祠: 의성을 모신 사당)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

  • 하남 남양의 제갈량의 제갈초려(諸葛草廬)(혹은 무후사武侯祠)의 천고인룡(千古人龍), 한소열황제삼고처(漢昭烈皇帝三顧處), 문도무략(文韜武略)의 세 개의 석방(石坊)과 인물소상, 명나라 성화연간(成化年間)에 만든 18개의 유리나한(琉璃羅漢)이 모두 훼손됨. 전각의 장식물도 모두 부서짐. 청나라 강희(康熙)가 지은 《용강지(龍崗志)》, 《충무지(忠武志)》 등의 목각본도 불에 탐.

  • 한중 면현(勉縣)의 고정군산(古定軍山) 석비는 제갈량이 지주(地主)분자라는 것 때문에 훼손됨.

  • 서성(書聖) 왕희지의 능묘와 20무(畝)에 달하는 금정관(金庭觀)이 거의 평지화됨. 남은 건 서성(書聖)의 망혼(亡魂)이 떠난 우군사(右軍祠) 앞의 오래된 몇 그루의 측백나무뿐.

  • 문성공주(文成公主, 당대의 공주)가 친히 주재한 송찬건포(松贊乾布)와 문성공주 두 사람의 소상(塑像)이 각랍사(覺拉寺)에 있었는데, 훼손됨.

  • 합비에서 대대로 보호해오고 매년 제사지내오던 포청천묘가 하루아침에 훼손됨.

  • 하남 탕음현 중학생이 악비 등의 소상, 동상, 진회 등 오간당(五奸黨)의 철궤상(鐵跪像),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비각(碑刻)까지 모두 없애버림.

  • 항주혁명청년이 악묘(岳廟, 악비의 사당)을 부수고, 악비의 묘도 파헤쳐, 악비의 유골을 태워 재로 만듦.

  • 주원장의 거대한 황릉석비(皇陵石碑)가 쓰러짐. 석인(石人), 석마(石馬)가 폭약으로 파괴됨. 황성(皇城)도 깨끗하게 철거됨.

  • 해남도의 천애해각(天涯海角)에 명나라 때 해서의 묘가 부서짐, 청백리의 유골도 파헤쳐짐.

  • 호북강릉(湖北江陵)의 명재상 장거정의 묘도 홍위병에게 파헤쳐지고 뼈가 불태워짐.

  • 북경성 내의 원숭환의 분묘가 파헤쳐져 평지가 됨.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목을 맨 회나무 또한 베어버림.

  • 여평고리(黎平故里)에 안장되었던 명나라 말의 명신 하등교(何騰蛟)의 사당에 있는 불상이 부서짐. 여평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하등교의 묘도 파헤쳐짐.

  • 《서유기》의 작가 오승인의 옛집은 강소성 회안현 하하진 타동항에 있었는데, 폐허로 변함. 이 집은 세 개의 담으로 구분되어, 남쪽은 객청(客廳), 가운데는 서재(書齋), 북쪽은 침실[卧室]로 구성된 단출한 집이었고, 수백 년간, 회안현에는 많은 절경이 있으나 사람들이 가서 문안하는 곳은 이 오래된 집과 그의 묘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홍위병이 《요재지이(聊齋志异)》 작가인 포송령(蒲松齡)의 묘를 파헤침. 묘에는 담뱃대와 머리맡의 책 한 권뿐이었는데 네 구절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이것이 포송령의 글인지 알아보거나 하지도 않고, 들판에 마구 흩어버린 후, 시체는 불태움.

  • 1959년에 세워진 청나라의 문인 오경재(吳敬梓)기념관이 문혁 때 부서짐.

  • 산동 관현중학 홍위병들이 교사의 선동 하에, 천고의개(千古義丐) 무훈(武訓)의 묘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친 후, 모여서 비판하고 태워 재로 만듦.

  • 북경 교외의 은제장(恩濟庄)에 묻힌 동치, 광서 양황제의 궁정대총관(宮廷大總管) 이연영의 묘를 파헤침.

  • 장지동(張之洞, 청나라 말기의 개혁가)의 묘가 파헤쳐졌는데, 청백리여서 보물이 없자, 홍위병의 수장(首長)인 장 씨 부부는 시체를 나무에 매달고 수 개월간 방치하여, 개가 뜯어먹기도 함.

  • 하남 안양현의 조간왕(趙簡王) 주고수(朱高燧)의 묘가 파헤쳐짐.

  • 흑룡강 흑하현에 있던 장군분(將軍墳)은 '제왕장상(帝王將相)'의 묘라는 이유로 파괴됨.

  • 송나라 때 시인인 임화정(林和靖, 967~1028)의 묘도 파헤쳐짐.

  • 청나라 말의 장태염(章太炎), 서석린(徐錫麟), 추근(秋瑾) 및 양내무(楊乃武)와 소백채(小白菜)의 사건에 관련된 양내무(楊乃武)의 묘도 모두 파헤쳐짐. 소의 귀신과 뱀의 요괴를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구호를 외쳤다고 함.

  • 강유위(康有爲, 변법자강운동을 양계초와 함께 주도함)의 묘도 파헤쳐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靑島)시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함.

  • 절강성 봉화현 계구진의 장개석의 옛집, 장개석 생모의 묘도 파헤쳐짐.

  • 남장현의 항일명장 장자충(張自忠)이 건축한 장공사(張公祠), 장씨의관총(張氏衣冠冢)과 3개의 기념정(紀念亭)이 파괴됨.

  • 양후청장군도 국민당반동파로 몰려 묘와 묘비가 훼손됨.

  • 신강 투루판의 화염산에 있는 천불동(千佛洞)의 벽화도 파괴됨.

  • 산서 운성박물관은 원래 관제묘였으므로 부수어버림.

  • 안휘 곽저현 문묘(文廟), 산동 래양 문묘, 길림시 문묘도 모두 파괴됨.

  • 당대(唐代)의 고승(高僧) 포선(褒禪)이 말년에 머문 곳이 현화산(縣花山)으로, 그의 사후(死後), 제자가 개명하여 포선산이 되었는데, 송왕(宋王) 안석(安石)이 유람하고 《유포선산기(游褒禪山記)》를 지은 후, 포선산은 유명해졌는데, 문혁 때 이를 사구(四舊)라 하여, 포선산에 있던 대소(大小) 두 개의 탑이 모두 훼손됨.

  • 전국최대의 도교성지인 노자강경대(老子講經台)와 주위 근 백 여개의 도관(道館)이 훼손됨.

  • 천년 넘게 자금성의 외성 역할을 해준 베이징 성곽을 3년만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현재 그 성곽 터에는 3환로가 깔리고 그 밑에는 베이징 지하철 10호선이 지어졌다.

  • 송대 대문호(大文豪)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는 송대 서예의 대가, 소동파(蘇東坡)가 글을 썼고, 비석에 새겨져 안휘 제현에 있었는데, 근 일천 년을 이어온 이 석비(石碑)를 넘어뜨리고 소동파의 글을 파내고 훼손했으며, 취옹정(醉翁亭) 안에 보관되어 있던 역대 명가(名家)들의 서책과 그림들을 모조리 훼손, 지금까지도 뭐가 훼손되었는지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음.

 

 

이것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

물론 이 정신나간 동란에도 간신히 살아남은 유적들도 있긴 있다.

 

 

 

자금성
포탈라궁
막고굴

 

 

자금성, 포탈라궁, 막고굴도 역시 홍위병들에 의해서 재가 될 뻔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경비병을 보내서 엄호한 덕에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힘을 닿는대로 문화재를 지켜보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파괴된 것은 문화재 뿐만이 아니였다. 중국의 전통 연극인 경극과 전통 음악,

전통 무술 등의 무형 문화재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에 필요한 가면과 의상, 대본은 불태워졌으며 무대는 사라졌다.

전통 악기의 울림 대신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나팔의 합창이 대륙을 뒤덮었다.

소림사에서 전해져 내려온 쿵푸도 소실되었다.

 

 

 

지식인이나 예술인, 과학자 등은 홍위병들에 의해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황실 만찬에 등장하는 요리비법을 전한 만한전석과 요리사들도 한순간에

증발했는데 훗날 만한전석을 복원하려고 청 대의 환관을 불러서 물었지만

하도 나이가 많아서 기억이 안 나는지라 최면요법을 동원하기까지 했댄다.

 

 

 

 

 

결국에는 중국보다도 이웃나라인 한국이나 일본이 중화 문명을 더 잘 보존한 형국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법도 잃어버려서 한국의 석전대제를 참고해서 재현해야 했고

중국 역사에서 빛나는 시대인 당나라의 스타일도 오히려 일본이 더 잘 계승하고 있을 지경.

실제 중국에 대한 콘텐츠도 중국 본토보다는 홍콩, 마카오, 대만 등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입지않은

지역에서 쏟아져나오는 실정으로 중국의 소프트파워를 완전히 작살내놓은 것이다.

 

 

 

 

 

오늘날 중국인이 미개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문화대혁명 때문이다.

전통적인 미풍양속들은 봉건 잔재 취급을 받았고, 오히려 자식이 부모를,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는 행위가 장려되었으며 교육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성적인 논리보다

프로파간다와 우격다짐, 억지생떼, 진영논리, 그야말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세상이 된 것.

 

지식인과 예술인을 천대하는 시대를 겪었으니 지성과 교양에 대해서 콧웃음을 치고

질서가 붕괴된 시대를 겪었으니 에티켓과 절차를 모르고, 목소리 크면 이기는 시대를 겪으니 언성이 시끄럽게 되며

소련은 수정주의, 미국은 제국주의로 적대시하는 시대를 겪었으니 국수주의에 매몰되는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장제스가 털어서 가지고 온 유물들은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 중이다.

만약에 유물을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로 문화대혁명 때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대륙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어도 이러쿵 저러쿵 군소리를 못하고 있는 실정.

저우언라이와 장제스가 아니였다면 문화대혁명 때 남아나는 게 없다시피 파괴되었을 것이고

물론 장제스도 문화대혁명이 터질 거라는 건 몰랐겠으나 결과적으로 유물을 챙겨 남하한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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